화평의 길(2021.5.19 수)
유투브에서 추천되었길래
문득 보게 되었다.
최근 동학 등 조선시대 말엽에 출현한 민족종교 관련 책을 읽던 중이었기에
흥미롭게 봤다.
종교가 민중을 보듬을 때
사회참여에 떠밀릴 수도 있다.
동학이 드디어 무력을 드러냈는데
그 과정에는 복잡다단한 사상들이 노출된다.
전봉준의 봉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차피 실패할 것이니 그냥 열기를 식혀버려야하는가?
민중의 힘에 따라 봉기하였지만 수 십만의 생령이 희생되지 않았던가?
지켜만 보던 입장은 친일로 흘러가는 수순인듯하다.
강증산이 친일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강증산은 동학 봉기에 참여하지 않고 거룩한 말씀?만 하였다.
정말 어려운 숙제이다.
증산이
보물을 10년후 찾아오는 을미생?에게 전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보물을 받아든 이가 조철제이다.

화평의 길
개 봉 1984.11.17
장르 드라마
국가 한국
등급 전체관람가
러닝타임120분
기획 김정조 원작 김태원 각본이형우
주연 전운 이순재
1871년 전북 고부군 객망리에서 출생한 증산은 소년시절부터 남다른 사고를 바탕으로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청년 시절에 이미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정치 사회외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교화에 힘쓰면서, 한일합방을 탄핵하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었다.
증산이 거서한 후 그를 신격화한 종도들은 그의 행적과 사상을 모아 증산 사상을 신앙화하여 교세를 떨쳤지만,
대동아전쟁 과정에서 탄압을 받게 된다.
해방 후 그의 교리는 다시 이어져 민족 정교로서 정신도량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다음 영화에서 발췌>

아래는 다음백과에서 부분 발췌한 것이다.
<증산교>
교조의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분파된 종단들을 통칭하여 창시자의 호를 따서
증산교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흠치교(吽 哆敎)라고도 했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의 하나이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특히 무속과 선도를 계승·발전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조철제>
1895년(고종 32) ~ 1958년
일제강점기 증산교 계통의 태극도를 창립한 종교창시자.
호는 정산(鼎山). 경상남도 함안 출신. 항일운동을 하던 아버지 용모(鏞模)를 따라 15세 때 만주 심양으로 가서 구국운동에 가담하다가 김혁(金赫)으로부터 증산(甑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사(大事)에는 도력(道力)이 필요함을 절감, 입산수도하던 중 23세 때 강일순(姜一淳)의 『태극도리(太極道理)』를 읽고 개안영통하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전라북도 태인면 태흥리에서 무극도(無極道)를 창도, 증산사상을 포교하여 많은 신도가 모여들었다. 그 뒤 3년 동안 120여 칸의 교당을 짓고 10만의 신도를 가지는 대교단을 이루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조천자(趙天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진업단(進業團)이라는 신도단체를 만들어 충청남도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지공사를 벌여,
안면도에는 20만 평의 농경지를, 원산도에는 대규모 염전을 만들었다.
1930년 평안북도 무산의 국유림을 채벌하기 위하여 400여 명의 신도를 보내었고, 1932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의 사금광과 충청북도 음성군의 무극광산을 채굴하였다. 이와같이, 황무지와 간척지 개척, 수리사업 및 산업장려로 수많은 빈민을 구제하는 사업을 벌이며 포교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하여 교단이 해체되고 본부가 철거당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종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본부를 부산 보수동에 정하고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5년에는 다시 본부를 부산 감천동으로 옮겨 3,000세대의 신도를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대규모 신앙촌을 형성하였다.
<대순진리회> 연원 및 변천
1958년 태극도 도주(道主)였던 조철제(趙哲濟)가 사망하자,
제2대 도주로 선출된 박한경과 조철제의 아들인 영래(永來)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러자 박한경은 1969년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으로 옮겨 교단명칭을 ‘대순진리회’로 바꾸었다.
사회와 단절하고 폐쇄적 생활을 하던 부산시절과는 달리 서울에서는 적극적인 포교활동과 사회활동을 전개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1971년 종단의 도장이 완공되었고, 1987년 여주에 수도장이 건립되었다.
1993년 2월 종단 본부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으로 이전되어 본부도장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조직의 운영은 도헌(道憲)에 따르며,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와 집행기관인 종무원이 중심기관이다.
종의회는 전국의 선감(宣監)·교감(敎監)·포정(布正)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무원에는 기획부·총무부·교무부·수도부·교수부가 각기 직무를 담당하고 있다.
대외의 사업기관으로는 대순종교문화연구소·대순출판부·대진학원이 있고,
이러한 조직기관과는 별도로 감사원이 있어 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증산도>
1974년 안운산(安雲山, 본명 안세찬)과 아들 안경전(본명 안중건)이 창립한 종교.
그는 원래 보천교 출신으로 증산교 연합운동에도 참여했으나 그뒤 대전을 중심으로 증산교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안경전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현대사상과 과학을 수용하면서 증산사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강증산(姜甑山, 본명 강일순. 1871~1909)을 '증산상제'로, 그 아내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를 '태모 고수부'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하며, 강증산과 고수부의 행적을 기록한 <도전(道典)>을 경전으로 삼는다.
<도전>은 일제 강점기 이후 증산 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각 교단의 경전을 통합하고, 관계자의 증언과 현장 탐방을 통해 보완하여 1992년 발간되었고 2003년 개정되었다.
후천개벽(後天開闢)·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해원(解寃) ·상생(相生)을 근본 이념으로 한다. <도전> 외에 <증산도의 진리>, <다이제스트 개벽>, <이것이 개벽이다> 등을 발간, 포교를 진행하여 교세를 넓혔다. 각 지역에 도장을 설치하여 종교 예식인 치성을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진행한다. <환단고기>를 종통의 역사로 삼으며, 환인천제·환웅천황·단군왕검을 시조로 배향하고, 지역에 따라 그 지역의 산신과 기지신(基地神)을 배향한다. 2007년부터 STB상생방송을 운영하고 있다.
신앙한다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입장은 없으며
문화로서 존중하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