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제10차 중국여행 11/14일차 악양루 (2017.5.24 수)

무논골 2017. 6. 16. 23:27

봉황고성을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악양까지 긴긴 시간을 버스로 달렸다.

악양버스터미널에 도작한 것은 4시반이 다 되었을 때일 것이다.

470km를 달렸다.

 

도화원휴게소에서 거의 두 시가 점심을 먹었다. 옥수수 2개 10원,물 1병 3원

 

 

 

 

 

1250  五强溪風景區, 五强溪位于沅陵县东北部与常德市桃源县接

1350 桃花源古镇 湖南省常德桃花源旅游区位于湖南省桃源县西南15公里的水溪附近,距常德市34公里。

        土地面积面积157.55平方公里,人口约为3.87万人。

        其中镇区规划范围总面积9.2平方公里,“世外桃源”主体景区15.8平方公里,“武陵人捕鱼为业”的沅水风光带 

        水域44.48平方公里。
1426 常德 ,古称武陵、朗州,别名“柳城”,是湖南省辖地级市,省域副中心城市。

        常德位于湖南北部,江南洞庭湖西侧,武陵山下,史称“川黔咽喉,云贵门户”,

        是长江经济带、环洞庭湖生态经济圈的重要城市。

1531 넓은 평원

1548 花容

1612 君山톨게이트

1630  동정호버스터미널 도착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반이라 악양루 관광하기에 시간이 촉박할듯하여

현지인에게 길 묻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워 우선 택시를 탔다. 택시비 20원

 

 

동정호의 첫 인상이다.넓게 습지 초목들이 펼쳐지고 큰 배들이 떠 있다.

 

 

이 동정호 가에 악양루가 서 있다.

 

岳阳古称巴陵、又名岳州,为湖南省辖地级市、第二大经济体,省域副中心城市。建城始于公元前505年,是一座有着2500多年悠久历史的文化名城。位于江南洞庭湖之滨,依长江、纳三湘四水,江湖交汇,是一个资源丰富、区位优越、风景优美的地方。不仅是中国南北东西交通要道、国务院首批沿江开放之重地,且是长江中游重要的区域中心城市、湖南首位门户城市。

 

岳阳楼-君山景区 : 为国家5A级旅游景区,是长江黄金旅游线上湖南境内的唯一景点,是岳阳旅游业的龙头。岳阳楼耸立在湖南省岳阳市西门城头、洞庭湖畔,自古有“洞庭天下水,岳阳天下楼”之誉,与湖北武汉的黄鹤楼、江西南昌的滕王阁并称为江南三大名楼,并且是三大名楼中唯一一个保持木质架构的古楼。其不仅在国内历史文化具有重要地位,更对东亚具有深远影响,如韩国分别在首尔、咸安郡、河东郡三地建有“岳阳楼”,以接续其“忧乐精神” 。

君山岛又名爱情岛,系洞庭湖中小岛,位于岳阳市区西南方,水程12公里。总面积0.98平方公里.与千古名楼岳阳楼隔湖相望。是一个山体呈椭圆形,两旁高、中间低的小岛。山上有大小峰72个。

 

악양루岳陽樓 : 호남성 악양시(岳陽市) 서문(西門)의 성루(城樓) 위. 노숙열병대(魯肅閱兵臺)라고도 한다. 노숙이 동정호(洞庭湖)에서 수군을 훈련시킬 때, 파구(巴丘)의 관저를 확장해 성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산을 등지고 호수에 접해 있는 서문 위에 열병대(閱兵臺)를 세웠는데, 열군루(閱軍樓)라고도 불린다. 양진남조(兩晉南朝) 시기, 이 누각을 보수한 뒤 성루(城樓)라고 불렀다. 당대 개원(開元) 4년(716)에 장열(張說)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지키면서 성루를 확장한 후에야 비로소 악양루(岳陽樓)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보수와 붕괴를 거듭하면서 명성이 날로 높아 갔다. 현재의 누각은 높이 20m, 좌우 폭 17m, 앞뒤 폭 14m, 점유면적 250m2이다. 3중 처마를 한 3층 건물인데, 지붕은 투구형 겹처마이며 순수한 목조 건물이다.

 

늘 그리던 악양루,드디어 왔다.

 

입장료는 160원

 

200773日,郭沫若题写“岳阳楼”匾挂在岳阳楼顶楼东侧,匾5.12米、1.34米、重250公斤,由7楠木制作,堪“三湘第一匾”。(1961년 곽말약은 악양루라는 편액을 기념으로 적었는데,그 편액을 2007년 7월 3일에 악양루 동쪽에 녹나무를 재료로 하여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편액의 규모는 길이는 5.12m,너비 1.34m,무게 250kg이며, 7금실로 적었으며 감히 삼상의 제일 편액이라 할만하다)

 

 

반대편으로 통할 수 있고 동정호에 닿을 수 있다.

 

 

강변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악양문

 

 

 

동정호를 등지고 촬영한 악양루

 

 

악양루를 서쪽에서 구경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통로

 

악양루라는 명칭으 그대로인데 대대로 여러차례 신축과 보수를 반복하였고

각 시대별로 악양루를 축소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와 한나라 진나라에도 악양루가 있었겠지만 모형으로 재현할 사료가 없어 당나라이후 5대에 걸친 악양루 모습을 볼 수 있다.

 

五朝楼观位于湖南省岳阳楼景区内、以青铜微缩铸造的形式,重现唐、宋、元、明、清等朝代五座风格各异的岳阳楼,五楼为水蜿蜒环绕,巍楼倚碧水,动静结合,刚柔并济。各楼均参照相关朝代建筑上的建筑符号而建,全部采用H78黄铜铸造。

 

 

당나라 시대 악양루  唐代岳阳楼

 

建筑模型平面呈正方形,面阔七间,进深五间,边长5.39米,高5.19米,净重12.3吨,其匾额为唐代书法家颜真卿所书

 

 

송대 악양루 宋代岳阳楼

 

以北京大学图书馆收藏的宋代宫庭画院《岳阳楼图》为蓝本而铸,模型平面呈长方形,面阔3.608米,进深3.092米,高4.5米,净重12.2吨,其匾额为宋代书法家米芾所书。

 

 

北宋庆历四年(1044)春,滕子京受,任岳州知州事。

北宋庆历五年(1045)春,滕子京重修岳阳楼并拟修筑偃虹堤。

北宋元丰元年(1078)十月,岳阳楼毁于火灾。

北宋元丰二年(1079)春,岳州代理知州军郑民瞻重修岳阳楼

元古八年(1085)孟夏,米芾《岳阳楼记馈赠者。

北宋崇宁年11021106)岳州知州军孙勰重修岳阳楼

 

南宋建炎三年(1129)正月,岳阳楼于大火。

南宋元四年(1198)重修岳阳楼

南宋嘉定十七年(1224)六月二十一日,二十三日,岳阳楼毁于火。

南宋淳祜十一年1251)重修岳阳楼

 

원대 악양루  元代岳阳楼

 

以故宫博物院收藏的元末明初界画家夏永所绘《岳阳楼图》为蓝本,模型平面呈长方形,面阔3.608米,进深3.092米,高4.3米,净重12.2吨,其匾额为元代书法家赵孟頫所书。

 

명대 악양루  明代岳阳楼

以上海博物院收藏的明代宫廷画家安正文所绘《岳阳楼图》为蓝本,模型平面呈六边形,单面阔1.86米,高4.5米,净重9.1吨,其匾额为明代书法家董其昌所书。

 

 

明宣德年至正三年(14261438)明威将军刘整修岳阳楼

明成化七年(1472)五月岳州知府吴节重修落成岳阳楼

明嘉靖二年(1523)岳州知府士英重修岳阳楼刻《岳阳楼诗集》。

明嘉靖六年(1527)五月大水成灾,岳阳楼楼柱被雷破。

明嘉靖四十三年(1564)岳州知府李临阳修整岳阳楼,作有《重修岳阳楼记》。

明隆元年(1567)岳州知府李是渐缮修城垣,重修岳阳楼

 

청대 악양루  清代岳阳楼

 

以清代画家龚贤所绘《岳阳楼图》为蓝本,模型平面呈长方形,面阔4.43米,进深3.152米,高4.83米,净重10.7吨,其匾额为清朝康熙皇帝所书。

 

清顺治三年(1646)九月,岳阳楼毁于战乱。

清顺治七年(1650)知府李若星重修。是年,毁于火灾。

清康熙二年(1663)重建岳阳楼。

清康熙二十二年(1683)春,岳州知府李遇时、巴陵知县赵士珩倡捐重建岳阳楼。

清康熙二十七年(1688)岳州火灾,延烧岳阳楼。

清乾隆五年(1740)湖广总督班第拨舵杆洲岁修缮岳州府城垣及岳阳楼。冬,兴工重修岳阳楼及城垣。重建的岳阳楼其制三层,楼右侧建有宾馆。清乾隆七年(1742)岳州知府黄凝道修葺岳阳楼,捐建宾馆前厅。次年,请刑部尚书张照书范仲淹《岳阳楼记》勒于楼屏。

清乾隆三十九年(1774)岳州知府兰第锡、巴陵知县熊懋奖请求修葺府城。经湖南巡抚梁国治等先后具奏,修葺府城垣及岳阳楼、文星阁。

清乾隆四十年(1775)巴陵县知县熊懋奖承修岳阳楼,并于楼右侧建“望仙阁”,于楼左侧重建“仙梅亭”。

清道光元年(1821)翟声焕卸任后,新任知府志勤继岳州知府杨廷柱、岳州知府翟声焕续劝捐修整,并重修岳阳楼泊岸。

清道光九年(1829)夏岳州知府吕恩湛劝捐补葺岳阳楼、仙梅亭。

道光十九年(1839)十二月岳州代理知府翟声诰集次修葺岳阳楼。并修建“斗姆阁”。

清同治六年(1867)曾国荃拨岳卡厘税重修岳阳楼。将“斗姆阁”改建为“三醉亭”。何绍基书“留仙亭”字匾悬于亭额。

清同治十二年(1873)岳州知府张德容劝捐整修岳阳楼基础,同时生建宸翰亭。

清光绪六年(1880)岳州知府张德容重建岳阳楼,将楼址东移六丈多。

清光绪二十三年(1897)六月,黄遵宪登岳阳楼,作《上岳阳楼》诗。

清光绪三十四年至民国4年(1908~1915)日本东亚国文书院,先后遗派遣7批学员登览岳阳楼,并记入其编写《支那省别全志》。

清宣统三年(1911)甘兴典领兵七八百人占岳阳楼,向岳州绅商居民要粮银。唐莽、宋式奔与湖南都督府智拿甘兴典。

 

岳陽樓記 악양루기

 

1983년,2층에는 청나라 최고의 서예가 照(1691~1745)  《岳阳楼记》雕原物을 상감하였다.기록에 의하면 1966년 9월 홍위병들이 와서 장조의 글씨를 때려 부셔(záhuǐ)라고 했던 것을 관리원이 용캐 보존했다가 중건한 것이다.  

 

 

등자경滕子京이 중수하고 범중엄范仲淹이 글을 짓었다.

아래 해석과 번역 출처를 밝힌다.고맙다.

http://stmarysclinic.tistory.com/615

 

慶曆四年春, 滕子京謫守巴陵郡.

경력사년춘, 등자경적수파릉군.

송 인종 경력 4년(1044) 봄, 등자경이 파릉군의 태수로 쫓겨났다.

 

越明年, 政通人和, 百廢具興,

월명년, 정통인화, 백폐구흥,

이태 후, 정사가 통하고 백성들이 화합하여 온갖 폐지된 것들이 다시 일어났다.

 

乃重修岳陽樓, 增其舊制,

내중수악양류, 증기구제,

이에 악양루를 중수하여 옛 모습보다 더 크게 짓고

 

刻唐賢今人詩賦於其上;

각당현금인시부어기상;

당조 때의 현인들과 지금 사람들의 시부를 새기고는

 

屬予作文以記之.

촉여작문이기지.

내게 문장을 써 기록할 것을 부탁하였다.

 

予觀夫巴陵勝狀, 在洞庭一湖.

여관부파릉승상, 재동정일호.

내가 보니 파릉의 뛰어난 풍광은 동정호라는 호수 한 곳에 있다.

 

銜遠山, 呑長江, 浩浩蕩蕩, 橫無際涯;

함원산, 탄장강, 호호탕탕, 횡무제애;

먼 데 산을 머금고 장강을 삼켜 힘찬 기세가 끝 간 데를 모르고

 

朝暉夕陰, 氣象萬千;

조휘석음, 기상만천;

아침에는 햇살이 눈부시고 저녁에는 노을이 아름답고 날씨는 천변만화 조화를 부리니

 

此則岳陽樓之大觀也, 前人之述備矣.

차즉악양루지대관야, 전인지술비의.

이것이 악양루의 큰 구경거리인데, 옛사람들도 모두 이를 기술해두었다.

 

然則北通巫峽, 南極瀟湘,

연즉북통무협, 남극소상,

그런즉 북으로는 무협으로 통하고 남으로는 소수와 상강으로 이어져

 

遷客騷人, 多會於此, 覽物之情, 得無異乎?

천객소인, 다회어차, 남물지정, 득무이호?

이곳에 모여 경물을 둘러본 좌천된 관리들과 시인들의 심정에 다름이 없었겠는가?

 

若夫霪雨霏霏, 連月不開;

약부음우비비, 연월불개;

궂은비 추적추적 내리기라도 하면 몇 달 동안 개이지 않고;

 

陰風怒號, 濁浪排空;

음풍노호, 탁랑배공;

음산한 바람이 성난 소리로 울부짖고 흐린 물결은 크게 일어 하늘로 솟고;

 

日星隱耀, 山岳潛形;

일성은요, 산악잠형;

해와 별의 빛이 가려지고 산들이 그 형체를 감추며;

 

商旅不行, 檣傾楫摧;

상여불행, 장경즙최;

장사꾼과 나그네들이 다니지 않아 돛대가 기울고 노가 부러지며;

 

薄暮冥冥, 虎嘯猿啼;

박모명명, 호소원제;

황혼에 어둑어둑해지면 호랑이와 원숭이가 울어대니;

 

登斯樓也, 則有去國懷鄕,

등사루야, 즉유거국회향,

이런 때 누대에 오르면 도성 떠난 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憂讒畏譏, 滿目蕭然,

우참외기, 만목소연,

참소를 걱정하고 비난을 두려워하며 눈에 드는 것들마다 쓸쓸해져서

 

感極而悲者矣!

감극이비자의!

감회가 지극해지고 슬퍼질 것이다.

 

至若春和景明, 波瀾不驚,

지약춘화경명, 파란불경,

따뜻한 봄이 되면 경치가 맑고 밝고 물결도 일지 않아

 

上下天光, 一碧萬頃;

상하천광, 일벽만경;

위아래 하늘빛이 한결같이 푸르러 끝 모르게 드넓다.

 

沙鷗翔集, 錦鱗游泳,

사구상집, 금린유영,

모래밭에는 백구들 날아와 날개를 접고 비단 같은 고기들은 헤엄을 치고

 

岸芷汀蘭, 鬱鬱青青.

안지정란, 울울청청.

강기슭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들은 향기가 짙고 무성하다.

 

而或長煙一空, 皓月千里,

이혹장연일공, 호월천리,

어떤 때는 긴 안개가 하늘을 채우고 어떤 때는 흰 달이 천 리를 비춘다.

 

浮光躍金, 靜影沉璧,

부광약금, 정영침벽,

물 위에 비친 달이 금빛처럼 일렁이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옥이 잠긴 듯한데

 

漁歌互答, 此樂何極?

어가호답, 차락하극,

어부들 노랫소리 주고받으니 이 즐거움 어찌 다함이 있을 것인가?

 

登斯樓也, 則有心曠神怡,

등사루야, 즉유심광신이,

이런 때 누대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즐거워져

 

寵辱偕忘, 把酒臨風,

총욕해망, 파주임풍,

총애와 욕됨을 모두 잊고 술잔 들고 바람을 마주해보면

 

其喜洋洋者矣!

기희양양자의!

그 기쁨이 다함이 없을 것이다.

 

嗟夫! 予嘗求古仁人之心, 或異二者之爲, 何哉?

차부! 여상구고인인지심, 혹이이자지위, 하재?

슬프다! 내가 옛 성현의 마음을 찾아봤더니 두 가지 다른 것이 있었는데 왜 그런 것인가?

 

不以物喜, 不以己悲,

불이물희, 불이기비,

그들은 바깥 사물로 인하여 즐거워하지 않고 자기 일로 슬퍼하지 않으며

 

居廟堂之高, 則憂其民;

거묘당지고, 즉우기민;

조정에 있을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처강호지원, 즉우기군,

강호에 멀리 나가 있을 때는 군주를 걱정하니

 

是進亦憂, 退亦憂;

시진역우, 퇴역우;

이는 나가도 근심하고 물러나서 또한 근심하는 것이다.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

연즉하시이락야? 기필왈:

그렇다면 어느 때나 즐거워했을 것인가? 그들은 말했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낙이락여!」

‘천하 사람들에 앞서서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라’라고.

 

噫! 微斯人, 吾誰與歸!

희! 미사인, 고수여귀!

아! 이런 사람들 없었다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배우고 살아갈 것인가?

 

時六年九月十五日.

시육년구월십오일.

이때가 경력 6년 (1046), 9월 15일이다.

 

3층에 있는 모택동 글씨이다. 1983년에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5언율시를 상감(嵌xiāngqiàn)한 것이다.

 

두보는 57세(서기 768년)에 이곳에 전란을 피해 홀로 왔지만

난 지금 아내와 유람와있으니

내 인생도 과히 나쁘지는 않는듯하다.

 

두보가 자신의 시를 붓으로 썼다면 모택동의 호방한 글씨처럼 했을까?

두 영웅의 묘한 대조가 느껴진다.

 

 

기념관(매점)에는 모택동을 비롯한 이곳 인물들의 밀랍상이 전시되고 미니어처를 판매하고 있다.  

유우석 이백 두보 범충엄 등자경 소교 등등....

미니어처를 살 수도 있고 밀랍상 앞에서 돈 주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내가 모택동과 그의 붓글씨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무료로 호의를 베풀어준다.

원래는 10원을 내야하는데...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올라

 

< 두시언해(杜詩諺解)>로 남겨본다.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녜 洞庭(동정)ㅅ 므를 듣나니,

(옛날에 동정호에 대해서 절경이라는 말만 들었더니,)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오늘 岳陽樓(악양루)의 올오라.

(오늘에야 동정호를 보기위해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吳(오)와 楚(초)왜 東南(동남)녀키 ㅷㅓ뎟고,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에 갈려졌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하늘콰 ㅼㅏ콰는 日夜(일야)애 떳도다.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항상 동정호위에 떠있도다.)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親(친)한 버디 한 字(자)ㅅ 글월도 업스니,

(친한-가까운- 벗의 편지-서신-는 없으나,)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 늘거 가매 외라왼 배옷 잇도다.

(늙어감에 외로운 배만 있는구나.)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사호맷 마리 關山(관산)ㅅ 北(북)녀긔 잇나니, → 전쟁 끝나지 않음. ;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싸움터의 말이 아지도 관산 북쪽에 있으니,)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軒檻(헌함)알 비겨서 눈므를 흘리노라.

(헌함을 비겨서 악양루의 난간에 의지해 눈물을 흘리노라.)

 

 

아래에는 동정호와 악양루에 관한 문학 작품 몇 가지 더 조사한 것이다.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못한 것도 있다.

 

                      望洞庭

 

                        劉禹錫 (772 ~ 842)

 

湖光秋月兩相和호광추월양상화한데

潭面無風鏡未磨담면무풍경미마라

遙望洞庭山翠小요망동정산취소하니

白銀盤裏一靑螺백은반리일청라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호수 물빛은 가을 달빛과 어울리는데

호수 면은 바람 없지만, 거울을 갈지 않은 것 같다.

멀리 동정호를 바라보니 군산이 푸르고 작으니

흰 은쟁반에 담긴 한 마리 푸른 고둥 같다.

 

낙신 본 바에 의하면 위 밑줄의 글자가 인용하는 것마다 다르다.

중국 화문출판사 2009년 발행 李靜 등이 펴낸 “당시송사감상“에는 山水色,

유투부에서 검색한 중국 아동 교육용 동영상에는 山水翠

 

 

악양루에서 동정호를 바라보다.

유리로 만든 황금색 기와가 가깝게 보이고

오른쪽으로 비취색 지붕은 삼취정인가보다.

 

동정호 안에 있는 작은 산인 군산君山을 가리키며, 군산君山은 상군湘君인 아황娥皇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전설 속 요堯임금의 두 딸인데, 맏이는 아황娥皇이고 다음은 여영女英이다. 요堯가 순舜의 재능과 덕을 높이 평가하여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순舜임금이 천자天子가 되자 아황은 후后가 되고 여영은 비妃가 되었는데, 세상에서 두 비의 총명하고 정숙貞淑하고 인자仁慈함을 일컬었다. 훗날 순임금과 함께 남쪽으로 순수巡狩를 나갔다. 두 사람은 순임금이 남쪽을 순수할 때 태풍을 만나 동정산洞庭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순 임금이 창오야蒼梧野에서 급서急逝했다는 소식을 듣자 두 사람은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소상瀟湘 사이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전하기로는 이후 지역민들은 두 여인을 상수湘水의 신神으로 받들어 아황娥皇은 상군湘君, 여영女英은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일컫고, 이 지역에서 나는 대나무에 그들의 피눈물 흔적을 상징하는 얼룩무늬가 있다고 하여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하였다. 후난 성湖南省 웨양岳陽 서남 동정호 내에 있는 군산君山 동쪽에 두 사람의 무덤인 ‘이비묘’가 있다. 군산君山은 고대에는 동정산洞庭山, 상산湘山 유연산有緣山 등으로도 불렸는데 악양루岳陽樓에 오르면 먼 모습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题岳阳楼

 

                           白居易(772 ~ 846)

 

岳阳城下水漫漫, 独上危楼凭曲阑。

春岸绿时连梦泽, 夕波红处近长安。

猿攀树立啼何苦, 雁点湖飞渡亦难。

此地唯堪画图障, 华堂张与贵人看。

 

岳阳城下的江水水势浩大,无边无际;

独上高楼倚靠着栏杆眺望。

春天,草木的绿色与远处洞庭湖的水色相接,傍晚的彩霞与湖水中的红波交相辉映,

红波近处,似乎就是国都长安。

岸边山上的老猿正站在树上哭得凄惨,

天上的大雁要从这浩渺无边的湖上横空飞过还有许多困难。

这个地方风景壮阔美丽,只可画成画障,

挂在贵富人家的厅堂里供他们欣赏。

 

유우석과 백거이는 친구사이다.

 

당 헌종 元和十四년(819)봄에,48세의 백거이는 4년 동안의 江州(今江西九江)司马의 귀양살이 生涯를 마감하고

지금의 중경에 있는 忠州刺史로 부임하게 된다。그는 배를 타고 장강 연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지금의 호남성 악양시인 岳州를 지나가게 될 때 동정호반의 악양루에 올라 멀리 아스라한 물결과 그림처럼 아름다운 봄 경치를 보면서 《题岳阳楼》를 지었다。

 

 

望洞庭湖 贈張丞相<臨洞庭> (망동정호 증장승상)

                              孟浩然(689 ~ 740)

 

八月湖水平(팔월호수평),涵虛混太清(함허혼태청)。

氣蒸雲夢澤(기증운몽택),波撼岳陽城(파감악양성)。

欲濟無舟楫(욕제무주즙),端居恥聖明(단거치성명)。

坐觀垂釣者(좌관수조자),空有羨魚情(공유선어정)。

 

팔월이라 호수 물, 언덕까지 넘실넘실

허공을 머금어 하늘과 하나 됐네.

수증기는 운몽택(雲夢澤)에 자욱하고

물결은 악양성(岳陽城)을 흔드는데

물을 건너려 해도 배와 노가 없고

평소의 삶은 명철한 임금에 부끄럽구나.

낚시질하는 이를 앉아서 보니

공연히 고기 부러워하는 마음 생기네.

 

(중국어_인터넷 검색)

八月洞庭湖湖水暴涨几乎与岸平,水天一色交相辉映迷离难辨。

云梦大泽水气蒸腾白白茫茫,波涛汹涌似乎把岳阳城撼动。

想要渡湖却苦于找不到船只,圣明时代闲居又觉愧对明君。

坐看垂钓之人多么悠闲自在,可惜只能空怀一片羡鱼之情。

 

위 시에서 장승사은 장구령을 말하고 맹호연은 장구령에게 벼슬 청탁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与夏十二登岳阳楼

 

                      李白

 

楼观岳阳尽,川迥洞庭开。

雁引愁心去,山衔好月来。

云间连下榻,天上接行杯。

醉后凉风起,吹人舞袖回

 

《与夏十二登岳阳楼》是唐代诗人李白创作的一首诗。此诗描写诗人登岳阳楼极目远眺天岳山之南所见到的景象,表现了一时乐以忘忧的闲适旷达的襟怀。全诗没有正面描写楼高,而是运用陪衬、烘托和夸张的手法,从俯视、遥望、纵观、感觉等不同角度形容楼之高,不露斧凿痕迹,自然浑成,巧夺天工,风格飘逸潇洒。

 

           岳陽樓晩望

 

                     崔珏(唐代)

 

乾坤千里水云间,钓艇如萍去复还。

楼上北风斜卷席,湖中西日倒衔山。

怀沙有恨骚人往,鼓瑟无声帝子闲。

何事黄昏尚凝睇,数行烟树接荆蛮。

 

 

 

옥형정 玉衡亭

 

옥형은 혼천의라는 뜻인데.....사합회랑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이곳을 먼저 둘러 보고 악양루를 보겠지만 우리는 시간이촉박하여 엑기스인 악양루를 얼른 보고 시간에 따라 천천히 관람하였다.범중엄의 악양루기를 여러 서예가의 글씨로 감상할 수 있다. 

 

악양루를 보고자 북쪽에서 진입할 때 보이는 패방이다.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북쪽으로 무협과 통하고 남쪽에는 소수와 상강에 이른다 (북통무협 남극소상: 北通巫峽,南極瀟湘)" 구절을 인용하였다.

두 개의 기둥에 쓰인 대련은 장조가 지은 글을 류해속(劉海粟)이 글씨를 썼다.

 

 

 

 

 

선매정

 

선매정은 1639년 명나라 숭정(崇禎) 12년에 "선매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다. 1775년 청나라 건륭 40년에 중건하면서 선매정이라는 비석과 함께 <선매정기(仙梅亭記)>를 지어 각하였다.

크기는 작지만 영롱하면서도 아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회보정(懷甫亭)

 

1962년은 애국 시인 두보의 1250년이 되는 해이다.두보는 만년을 이곳 악양 일대에서 보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한 정자이다.정자 높이는 6.5m이고 앞면에는 두보의 화상과 그의 시 등악양루가 새겨져 있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위치이다.회보정이란 편액은 중국의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이자 전국인대 상위회 위원장인 주덕朱德의 글씨이다.

 

 

악양루 북쪽에 있는 소교 무덤

 

2교묘라고도 한다.삼국시대 주유의 화원이라고 전해지는데 사면을 담으로 둘러치고,정면에는 소동파의 글씨로

"遥想公瑾当年,小乔初嫁了,雄姿英发"적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자세히 못보고 왔다.

 

 

적벽대전 후 오촉은 형주(荊州) 쟁탈전을 벌렸는데 지금의 악양시인 파구(巴丘)가 그 요충지였다. 제갈 양은 조조가 강남을 넘보는 것은 두 미녀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손책과 주유를 충동질한다.미녀 큰 교씨는 손책의 부인이고 작은 교씨는 주유의 부인이기 때문에 주유를 충동질했다는 것인데 삼국지 이야기는 그대로 그냥 재미로 전해지는 이야기이고.....서기 210년 주유는 36세의 나이로 파구에서 병사하였고 노숙이 그 지위를 이어 받아 파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이 때 동정호를 수군 훈련기지로 삼았는데 노숙 대장이 서기 215년 지휘검열을 위해 세운 "열군루(閱軍樓)"가 악양루의 전신이다. 악양루 북쪽 있는 주유의 부인이었던 소교(小喬)의 무덤이 있는 곳은 이곳 지휘부가 있던 고시고....무덤 앞에는 초당과 그 안에 화상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무덤만 덩그러하다.

한국식으로 치면 아무도 벌초를 하지 않는듯한 인걸은 간데 없네...

 

 

 

여선사,여동빈(呂洞賓)의 사당.소교 무덤을 보고 강쪽으로 내려오다 만난다.

 

중국에서 속세를 초월하여 기이한 행동을 하며 살았던 여덟 명을 팔선(八仙)이라 부른다. 종리권(鍾離權), 장과로(張果老), 이철괴(李鐵拐), 한상자(韓湘子), 여동빈(呂洞賓), 조국구(曺國舅),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 女神仙)가 팔선이라고 전해 온다.

 

팔선의 한 사람인 여동빈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악양루를 유람하면서 삼일 밤낮을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이를 두고 "여동빈 삼취 악양루(呂洞賓三醉岳陽樓)"라는 고사가 세상에 전해온다.

 

1775년 선매정을 중수하면서 대취(大醉)의 지역이라는 의미로 정자를 세우고 망선각(望仙閣)이라 불렀다가 1987년 중수시에 삼취정(三醉亭)이라 고쳐 불렀다.

 

팔선의 하나인 여동빈(呂洞賓, 798~?, 이름은 암: 岩, 자는 동빈, 호는 순양자: 純陽子)은 악양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자영(自詠)>이라는 시를 지었다.

 

獨上高樓望八都(독상고루망팔도)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墨雲散盡月輪孤(묵운산진월륜고) 검은 구름 흩어지고 달만 외롭다.

茫茫宇宙人無數(망망우주인무수) 망망 우주에 사람은 많고 많으나

幾個男兒是丈夫(기개남아시장부)  남아 대장부 몇이나 될까?

 

 

삼취정에는 여동빈이 지은 칠언절귀가 걸려 있다고 하는데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조유북월모창오 朝游北越暮蒼梧

수리청사담기조 袖里靑蛇膽氣粗

삼취악양인부지 三醉岳陽人不識

낭음비과동정호 朗吟飛過洞庭湖

 

 

 

기념관 겸 매점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사진을 찍었다.

한국어 한마디씩은 하였다.

무척 반겨준다.

악양루 3층에 있는 것과 같은 모택동 글씨가 모택동 전신상과 같이 전시되어 있고

10원씩 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적혀 있는데 나에게는 공짜로 찍어도 된다한다.

그 사진을 올리 못했다.용량이 크다고.왜 그것만 용량이 커지는지 알지못하겠다.

 

 

기념관에서 만난 어린 직원들이 퇴근하다가 우리를 보고 반가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이곳 악양루를 서성인다.

 

동정호 홍수재해 기록을 표시한 비석

 

 

巴陵勝狀(파릉승상)이라 적힌 악양루 매표소를 나와서 강변과 나란히 쭈욱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걸었다.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숙소를 먼저 정할지 저녁을 먼저 먹을지....이미 어두워진 중국땅에서

정처없이 걷다가 식당가를 만나게 되어 강변 정취를 즐기면서 저녁을 먹었다.

 

68원어치....제법 멋진 저녁식사다.

혼자 다닐 때는 이런 일품요리를 시키지 않는다.

 

초어 草魚 58원, 맥주 7원, 수저와 젓가락 2원,화장지 1원이다.

초어는 잉어라고도 할 수 있고 산천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커다란 물고기 찜을 거의 혼자서 맛있게 처리하였다.

 

 

식사하고 첨양문을 지나 시장근처에서 숙소를 정했다.

방값은 100원이고 와이파이는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