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중국여행 13/14일차 호남성 장사 안록산,악록사,안록서원 (2017.5.26 금)
소산 여관집에서 불러준 승용차를 타고 소산터미널로 갔다.30원이다.
어제 오토바이 아저씨를 부르면 20원이었을텐데 좀 미안하기도 하다.
터미널 인근에 시장이 있다.아침부터 참 활기있게 붐빈다.
호떡 4개 4원,여우티아오 1개 1원,물 2병에 2원이다.
소산에서 7시 출발했다.버스비는 2인 66원이다.
장사서터미널에 8시 20분 도착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장사에서 악록산과 천심각만 보고 쉬려한다.
长沙,湖南省省会,古称潭州,别名“星城”,地处湖南省东部偏北,湘江下游和湘浏盆地西缘,是长江中游地区重要的中心城市 ,全国“两型社会”综合配套改革试验区、中南地区重要的工商业城市,中国重要粮食生产基地、能源原材料基地、装备制造业基地和综合交通运输枢纽,湖南省政治、经济、文化、科教和商贸中心,新一线城市。
长沙总面积1.1819万平方公里,其中城区面积2185平方公里;2015年,辖6个区、2个县,代管1个县级市,设有5个国家级开发区和9个省级园区;常住总人口743.18万。2015年,该市实现地区生产总值8510.13亿元,比2014年增长9.9%。
长沙是首批国家历史文化名城,历经三千年城名、城址不变,有“屈贾之乡”、“楚汉名城”、“潇湘洙泗”之称。
存有马王堆汉墓、四羊方尊、三国吴简、岳麓书院、铜官窑等历史遗迹,发生过清末维新运动、旧民主主义革命和新民主主义革命等爱国救亡运动,有黄兴、蔡锷、毛泽东、刘少奇、雷锋等名人,凝练了“经世致用、兼收并蓄”的湖湘文化,打造了“电视湘军”、“出版湘军”、“动漫湘军”、“演艺湘军”等文化品牌。
截至2016年,长沙共有高等院校57所,独立科研机构97家,两院院士52名,国家工程(技术)研究中心14家,国家重点(工程)实验室15个,国家企业技术中心12家;有杂交水稻育种、“天河”超级计算机、国内首台3D烧结打印机等重大科研成果。还有国家级新区-湘江新区,2016年5月6日,长沙开通了中国首条中低速磁悬浮线路。
12번 시내버스를 4원주고 타고 濚灣鎭(영만진)에서 하차하여 400m를 걸었다.
전용버스에 타고 산꼭대기로 가기로 했다.2인 40원이다.
한참을 산길로 올라가는데 숲속 녹음이 시원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기도 한다.
상운각에서 바라본 장사 시내
악록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은 깊고 조망은 참 좋았다.
무술인듯 춤인듯....
태극권 동작인듯하기도 하다만...
사진찍는 걸 편하게 여겨준다.
아래 기사는 하산하면서 대체로 먼저 만나는 순서대로 전개되고 있다.
百年前,在湖南这片热土,涌现了数以万计的辛亥革命志士,孙中山曾如是“夸赞”湖南人:“革命军用一个去
打一百个人,像这样的战争,是非常的战争,不可以常理论。像这样不可以常理论的事,是湖南人做出来的。”根据史料记载,先后有55名辛亥革命志士入葬岳麓山。
著名的有辛亥革命领袖、中华民国开国元勋黄兴、护国军将领、军事家蔡锷、武昌起义领导人蒋翊武、中国近代民主革命者陈天华等都长眠于此。
장사의 악록산은 서울의 남산과 비슷하다.도심 안에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 전망이 좋고,역사적으로도 의미 있기 때문이다.안록산에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이곳 출신 인물의 묘역이 있는데 시민들의 휴식처와 애국주의 교육 산실로서도 서로 잘 어울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신해혁명의 지도자 중의 1인인 황흥의 묘
황흥 비문
채악의 묘,1917년 4월에 34세로 운명하자 이곳에 국장하였다고 한다.
국장이라서 묘가 기품이 있지만 소박한듯하다.
고녹산사라고 적혀있다.
麓山寺又名慧光寺、万寿禅寺,位于湖南省长沙市湘江西岸岳麓山山腰,由敦煌菩萨笠法护的弟子笠法崇创建于西晋武帝泰始四年(公元268年),距今已有1700多年的历史,是佛教入湘最早的遗迹,现为湖南省重点文物保护单位和湖南省佛教协会驻地。 麓山寺坐落在岳麓山的古树丛中,是湖南省最古老的寺庙之一。始建于西晋泰始四年(公元268年),寺初名慧光明寺,唐初改名为麓山寺。该寺左临清风峡,右饮白鹤泉,前瞰赫曦丹枫、长岛湘流,后倚禹碑风云、深壑林海。有“汉魏最初名胜,湖湘第一道场”之誉,现为全国重点佛教寺院。该寺创建1700多年来,曾六度毁于战火。 1944年毁于日军,今仅存山门和藏经阁。殿堂现已修复,殿内千手观音庄严慈祥。寺由山门、弥勒殿、大雄宝殿、观音阁、斋堂等主要建筑组成。山门作牌楼式,额书“古麓山寺”,藏经阁又名观音阁,阁前有古罗汉松二株,传为六朝所植,又名六朝松,成为麓山寺悠久历史的活见证。
미륵전
대웅전.천도의식을 하고 있다.
천도 의식이 끝나고 공양간으로 가고 있다.
천도의식에 참석한 어느 여인
석주와 목재로 예쁘게 만든 법당의 뒷모습
법당 안에도 석주가 노출되게 있다.
법당 정면에 있는 부처님의 옆으로 돌아가면 뒤에서도 부처님을 참배할 수 있게 되어 있고....뒷 벽이 트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반야원.
다른 사람이 없고 적막하니 우리 세상이다.
불교사원인 녹산사를 참배하고
도교사원인 운녹궁은 가지 않았다.
녹산사 안내판에서 발견했다.김구 주석의 요양처라....
1938년 5얼 6일 조선혁명단 간부출신 이운한의 총격을 받고 수술한 뒤 요양한 곳일텐데...안내판을 가늠하여 녹산사 오른쪽으로 한참 되짚어
올라가봤지만 찾지못했다. 제9전구사령부 전시 지휘부 옛터로 가는 푯말만 봤다.
이런 구석진 곳을 찾는 나를 책하지 않고 동행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녹산사 앞에 있는 정자 악운정.또한 북벌열사정이라고 한다는데 1926년 북벌시 멱라강전역의 승리와 그 희생된 영웅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애만정
악록산에 참 예쁘게 앉겨 있다.
爱晚亭,位于湖南省长沙市岳麓山下清风峡中,始建于1792年,名字来源于杜牧的七言绝句《山行》中的“停车坐爱枫林晚”。
爱晚亭与陶然亭、湖心亭、醉翁亭并称中国四大名亭,也是革命活动胜地,为湖南省文物保护单位。亭形为重檐八柱,琉璃碧瓦,亭角飞翘,自远处观之似凌空欲飞状。内为丹漆园柱,外檐四石柱为花岗岩,亭中彩绘藻井,东西两面亭棂悬以红底鎏金“爱晚亭”,是由当时的湖南大学校长李达专函请毛泽东所书手迹而制。
爱晚亭,位于湖南省岳麓山下清风峡中,亭坐西向东,三面环山。始建于清乾隆五十七年(1792年),为岳麓书院院长罗典创建,原名红叶亭,后由湖广总督毕沅根据唐代诗人杜牧“远上寒山石径斜,白云深处有人家。停车坐爱枫林晚,霜叶红于二月花”(《山行》)的诗句,改名爱晚亭。又经过同治、光绪、宣统、民国至建国后的多次大修,逐渐形成了今天的格局。今亭与安徽滁州的醉翁亭(1046年建)、浙江杭州湖心亭(1552年建)、北京陶然亭公园的陶然亭(1695年建)并称中国四大名亭,为省级文物保护单位。爱晚亭是革命活动胜地,毛泽东青年时代,在第一师范求学,常与罗学瓒、张昆弟等人一起到岳麓书院,与蔡和森聚会爱晚亭下,纵谈时局,探求真理。[1]
该亭抗日战争时期被毁,1952年重建,1987年大修。亭形为重檐八柱,琉璃碧瓦,亭角飞翘,自远处观之似凌空欲飞状。内为丹漆园柱,外檐四石柱为花岗岩,亭中彩绘藻井,东西两面亭棂悬以红底鎏金“爱晚亭”额,是由当时的湖南大学校长李达专函请毛泽东主席所书手迹而制。亭内立碑,上刻毛泽东主席手书《沁园春·长沙》诗句,笔走龙蛇,雄浑自如,更使古亭流光溢彩。该亭三面环山,东向开阔,有平纵横十余丈,紫翠菁葱,流泉不
断。亭前有池塘,桃柳成行。四周皆枫林,深秋时红叶满山。
长沙岳麓山爱晚亭,驰名遐迩。此亭原名“红叶亭”,又名“爱枫亭”。今名“爱晚亭”,其名是谁改的呢?一直为人们所关注。长期以来有一种说法是:亭名“爱晚”是诗人袁枚改的。据说:袁枚访罗典(时任岳麓书院山长),罗轻其为人,不予接见。听说袁枚认为亭名“红叶”太俗,不若取“停车坐爱枫林晚”诗意改作“爱晚”,遂改。刊于1987年2月2日《华声报》上赵海洲的《爱晚亭与袁枚的诗》一文,即本此说。
上述故事颇富传奇,流传甚广。但实际上,这是“毕冠袁戴”,真正改名者应该是毕沅,而不是袁枚。
说爱晚亭名是毕沅改的,是罗典的《次石琢堂学使留题书院诗韵二首即以送别》诗后有一条自注:“山中红叶甚盛,山麓有亭,毕秋帆制军名曰‘爱晚’纪以诗。”据现有资料,知袁枚访问岳麓山是在乾隆四十九年(1784年)十一月二十七日。红叶亭的修建是在乾隆五十七年(1792年),晚于袁枚访问时间八年,显而易见,“爱晚”亭名不可能是袁枚所改。那么,为什么肯定说是毕沅改的呢?除了上述罗典诗的一条注以外,还因为,毕沅那时正任湖广总督,常到岳麓山爱晚亭一带游览。特别是,毕与罗有多年的交谊。他在乾隆五十四年(1789年)冬游岳麓山所写的两首长律中,对罗倍加称颂,并有“旧鱼重逢要夙愿”、“精神强胜廿年前”之句。因此,揆诸情理,亭改“爱晚”者也应该是毕沅,而不是袁枚。
爱晚亭位于岳麓书院后青枫峡的小山上,八柱重檐,顶部覆盖绿色琉璃瓦,攒尖宝顶,内柱为红色木柱,外柱为花岗石方柱,天花彩绘藻井,蔚为壮观。清乾隆五十七年(公元一七九二年)山长罗典所建。原名“红叶亭”,又名“爱枫亭”。后据唐代诗人杜牧《山行》而改名为爱晚亭,取“停车坐爱枫林晚,霜叶红于二月花”之诗意。
亭内有一横匾,上刻毛泽东手迹《沁园春·长沙》一词,亭额上“爱晚亭”三字是1952年湖南大学重修爱晚亭时,毛泽东同志接受校长李达之请,亲笔题写的。亭中方石上刻有张南轩和钱南园游山的七律诗,称“二南诗”。
亭前石柱刻对联:“山径晚红舒,五百夭桃新种得;峡云深翠滴,一双驯鹤待笼来”。爱晚亭在我国亭台建筑中,影响甚大,堪称亭台之中的经典建筑。
애만정은 동연정陶然亭、호심정湖心亭、취옹정醉翁亭과 더불어 中国四大名亭이며,
혁명활동의 승지라고 할 수 있다.
1925년 모택동 주석 나이 32세에 고향 소산을 떠나 광주로 가면서 이곳 장사를 들렀다.
이때 지은 詞.
沁园春·长沙
独立寒秋,湘江北去,橘子洲头。
看万山红遍,层林尽染; 漫江碧透,百舸争流。
鹰击长空,鱼翔浅底,万类霜天竞自由。
怅寥廓,问苍茫大地,谁主沉浮?
携来百侣曾游,忆往昔峥嵘岁月稠。
恰同学少年,风华正茂;书生意气,挥斥方遒。
指点江山,激扬文字,粪土当年万户侯。
曾记否,到中流击水,浪遏飞舟
在深秋一个秋高气爽的日子里,我独自伫立在橘子洲头,眺望着湘江碧水缓缓北流。
看万千山峰全都变成了红色,一层层树林好像染过颜色一样,江水清澈澄碧,一艘艘大船乘风破浪,争先恐后。
鹰在广阔的天空飞,鱼在清澈的水里游,万物都在秋光中争着过自由自在的生活。
面对着无边无际的宇宙,(千万种思绪一齐涌上心头)我要问:这苍茫大地的盛衰兴废由谁来决定主宰呢?
回想过去,我和我的同学,经常携手结伴来到这里游玩。
在一起商讨国家大事,那无数不平凡的岁月至今还萦绕在我的心头。
同学们正值青春年少,风华正茂;大家踌躇满志,意气奔放,正强劲有力。
评论国家大事,写出这些激浊扬清的文章,把当时那些军阀官僚看得如同粪土。
还记得吗?那时我们在江水深急的地方游泳,那激起的浪花几乎挡住了疾驰而来的船。
애만정에서 한참 쉬다가 송나라 주희가 공부했다는 악록서원으로 들어갔다.
100원
뒷문에서 거꾸로 구경하는 형국이다.
악록서원도 지금의 호남대학교의 한 교정일고 하며,호남대학교는 악록서원의 전통을 이은 천년학부라고 표어하고 있다.
1988年,岳麓书院建筑群被国务院批准为第三批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北宋开宝九年(公元976年),潭州太守朱洞在僧人办学的基础上,由官府捐资兴建,正式创立岳麓书院。
北宋祥符八年(公元1015年),宋真宗召见岳麓山长周式,御笔赐书“岳麓书院”四字门额。
嗣后,历经南宋、元、明、清各代,至清末光绪廿九年(公元1903年),岳麓书院与湖南省城大学堂合并改制为湖南高等学堂,沿用书院旧址。
1986年湖南大学宣布完成修复岳麓书院,并正式对外开放。
악록서원 건축분포도
악록서원
악록서원기
명산단석.여기서 명산은 형산을 말한다고 한다.
실사구시
실사구시란 말은 조선 실학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도남정맥
&%祠에 배향된 성현인데 메모가 불비하다.누구였더라?
서원의 교학시설의 일부.전체를 담기는 힘들었다.
사진의 오른쪽이 서원 정문이고...
사진의 왼쪽이 애만정과 가까운 후문이다.
나는 후문으로 들어와 정문으로 내려가면서 구경하였다.
굴자사(屈子祠),초나라 충신 굴원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인데....악록서원의 교학시설에 굴원이라...
별도의 공간도 아니고 좀 이해할 수 없는 배치였다.
성학연원..성인의 학문은 이 두 분에 의해 첫 물줄기가 열렸다는 뜻인가?
정이천 정명도 형제
주렴계 선생
어서루.황제가 이 서원에 책을 내려주었으니 황립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충.렴.
송나라 회암 주자의 글씨라고 적혀 있다.
1167년 주희朱熹는 이곳을 방문하여 이곳의 理學家인 장식張木式과 논학하였는데 역사상으로는 "朱張會講"이라고 한다.
효.절
서원 회랑
서원 회랑이 무슨 박물관처럼 거창하다.
서양인도 중국 문화에 감명받고자 방문하나보다.
그런데 사실은 중국에서 현재 볼 수 있는 문물들이 너무도 급조한 것이 많다.문화재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건조하다.
이 서원 어느 한 정원에는 통째로 시멘트 덩어리가 무너져 있다.
위에서 봤던 굴자사 같은 성현의 사당을 리모델링하는듯하다.
모든 문화재가 완전하게 옛 것일 수는 없다.그래도 복원한 문화재도 문화재일진데 리모데링한다면서 그렇게 아무 감정없이
통째로 그 참배시설을 쓰레기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도관고금으로 들어간다.
악록서원 옆에 있는 문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문묘는 문묘 자체로 중요한 중심부인데 여기에서는 악록서원의 부속 시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중국의 문묘마다 공자행교상이 서있다.
대성전
봉황고성의 대성전 보다는 대접이 좀 있는듯하다.
만세사표....만세토록 스승이다.
서원박물관에 있는 "호남대학" 현판.모택동 글씨
욕심나는 서물이 많지만 짐이 무거워지는 것이 호랑이 보다 무서워 지갑을 열지 않았다.
악록서원과 문묘를 참배하고 어느새 발걸음은 호남대학교 교정 안에 들어와 있다.
서원 앞에서 산 과일을 씻기 위해 교사 안으로 가려는데 출입증이 없다.
눈치 있는 학생이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사도 마치 사합원처럼 가운데에 식물도 있고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모택동 상이 있는 곳에 있는 자비정이라는 옛날 정자이면서 지금은 학교 기념품 가게로 이용하고 있다.
일하는 청년이 친절하다.
스스로 낮아지라는 뜻의 자비정은 1688년 청나라 강희제 때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의 서원은 위패를 모시는데
중국의 서원은 전산사 초상을 모신다.
조선의 서원은 조그마한데
중국의 서원은 배향하는 인물별로 공간이 각각 祠라하여 건물을 배치하니 정말로 넓은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 자비정 앞에서 과일도 먹고 한참 쉬다가 호남대학교 교정을 걸어 큰길까지 가서 버스를 탔다가 뭔가 방향 감각을 잃은듯하여
택시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