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인천광역시 인천향고 및 인천도호부청사(2020년 1월 26일,일)

무논골 2020. 1. 26. 22:58

설 연휴가 내겐 너무 길다.

설날 처가에 갔다가 의논하여

인천으로 옮겼다.


작년말에 동생이 넓은 집을 마련하였기에

방문하여 축하하고 조카들한테 세배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일요일 아침이 되어 동생 가족은 교회를 간다.

난 인천 여행을 하기로 한다.


예배를 마친 동생 가족을 다시 만나 점심을 같이 할 내심 계획도 있었으나

낯선 곳 여행이란 게 딱딱 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건 제안할 수 없었다.


1박 2일 인천에서 지낸 시간이 참 좋았다.

동생 집을 방문하여 좋았고

가족들과 인천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인천향교 홍살문 좌측에 있는 선정비


조선 시대 인천 부사 및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들의 선정비들인데

선정비(善政碑)는 일명 송덕비(頌德碑), 유애비(遺愛碑)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직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에게 은혜와 교화를 끼쳤을 때 이를 기념하고 칭송하는 의미에서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조선 인조 때 인천 부사를 지냈던 이후천(李後天),정조 때 인천 부사를 역임했던 황운조(黃運祚),

1876년에 세워진 경기도 관찰사 민태호(閔台鎬) 등 17인 18개 비석이 있다.


인천 곳곳에 있는 비석이 여기로 모여졌다.


근데 여기에는 친일파 박제순의 비석도 있다.

인천시민들도 이 친일파 비석을 어떻게 처리할지 골치인가보다.



인천향교라고 통칭되는 문학문묘 홍살문 








 

삼문

 

삼문 왼쪽에 바짝 붙어 있는 명륜당

명륜당이라는 교학기능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라는 제사기능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 배치이다.


앞 :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뒤 :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서울 성균관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성균관은 전묘후학 배치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며,

명륜당 앞에는 마당도 없어 출입이 불편하나,

문학산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전반을 조망할 수 있도록 건축되고

여름철에 들문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유려하고 소박한 중수 서가 있어 사진으로 남긴다.


 


인천 향교의 설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속수증보 인천 향교지(續修增補 仁川 鄕校誌)』를 근거로 한 구자혁의 1398년(태조 7)설과 인근 다른 지역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고려 인종 대에 설립되었다는 남달우의 설이 있다. 다만, 1406년(태종 6년)과 1466년(세조 12)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는 『인천 향교기(仁川 鄕校記)』의 기록에 따라 적어도 1406년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병자호란으로 불탄 것을 1701년(숙종 27)에 중수하였다.


1914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가 경기도 부천군으로 편제되면서 인천 향교의 명칭도 부천 향교로 바뀌었다. 당시 인천부와 부평부를 통합하여 부천군을 신설하였기 때문에 부천군의 관내에는 부평 향교와 부천 향교 2개의 향교가 존재하게 되면서 부천 향교의 존폐 문제가 대두되었고, 곧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이후 인천 향교의 복구가 시작되어 1946년 3월 인천 향교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부평 향교로부터 분리되어 인천 향교로 복원되었다. 인천 향교는 1976년 대성전, 명륜당, 삼문 등을 보수,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희맹 글

 




도관고금


공자 후손 德成이 쓴 글씨라는 뜻이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뭔가 어설프다...

콕 짚어 말할 수 없지만......


대성전에서 명륜당과 서재를 바라본 모습이다.


삼문에 들자마자 사진 왼쪽 기둥이 명륜당 건물이며

앞에 대성전이 보인다.


승학산이라는 작은 산에 안긴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형태




서무

 

 

대성전 안에 위패

맨 가운데가 대성지성 문선왕.즉 공자를 말한다.

 


공자(孔子)와

4성(四聖)[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10철(十哲)[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중국 송나라의 6현(六賢)[주렴계(周廉溪), 소강절(邵康節),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회암(朱晦菴)]


좌우의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 역대 유현(儒賢)[문창후(文昌侯) 최치원,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인천객사



공수公須라는 건물이다.


내 상식에서 공수 및 공수청을 처음 접한다.



다정한 모녀



인천 객사 소성관

소성은 인천 옛 이름 중 하나이다.


객사는 지방관이 망궐례를 치르거나 지방 출장중인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된다.


인천 객사 소성관은 전주 객사 풍패지관과 모습은 비슷하나

풍패지관을 여기에 댈 수는 없지......











객사에서 동헌을 바라보다.

 

 

객사 앞 놀이마당과 멀리 우뚝 솟은 관아문






위용있게 지은 관아문

그러나 관아문 이름 현판도 없다.



동헌이라고 한다.

설명에는 객사 동쪽에 있어서 동헌이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 西軒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서두에 인천 여행이 좋긴 좋았지만

도호부청사라는 이름으로 재현한

인천 객사와 동헌을 보노라니 한숨이 나온다.


구태여 복원을 했어야하는가?


백번 양보하여 복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복원을 했더라도 역사적 맥락을 안내문에 기술해야하지 않을까?

도호부 치소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전하였고

그 흔적이 지금 문학초등학교에 일부 남아 있는데...

지금 이곳은 뭐에 근거하여 어떤 역사성을 갖고 복원하였노라고~~


중국인들이 문혁 때 때려부순 문화재를 콘크리트로 복원하는 걸 여행하면서도

여러번 자문다답해보았다......


억지로 답을 해본다.


역사성은 없더라도

시민들이 놀이공간 휴식공간으로라도 제공되고 있으니 휑한 공원보다야 낫지 않을까?


딱 그 느낌을 대한민국 행정에서도

자문자답하다니......


[작성일 2020.2.2 일]

20200202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날이다.

이런 숫자는 천년에 한번이라고 에스엔에스에서 나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