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담론

625전쟁 1129일 요약본(2016-06-09 목)

무논골 2016. 6. 21. 22:01

서울 왕십리광장에서 한국자유*연맹 성동구지회에서 무료 배부하고 있는 책


자유*** 이런 동네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지만

1차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고 단숨에 읽었다.


전쟁이 개시되면서 온통 전투에만 집중되는듯하지만,

민생은 있고 정치는 있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부르스커밍* 교수 책도 느낌은 있지만 기억이 가물거리고

육이오 경험 어른들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도 희미해지고 특히나 개인 경험은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는데

이 책은 전쟁의 흐름과 전쟁 속에 전개된 각종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과 시사를 주고 있다.



부영창업자,이런 분인 줄 몰랐다.

공군장교 출신,기업인,저술가


 

1950년 경인년 단기 4283년


7월 1일 토,7일차, 외신,중공군 부대가 압록강 연안에 집결중이라는 보도

7월 3일 월,9일차, 평양 야간 폭격

7월 4일 화,10일차,평양방송,김일성이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고 방송

                         남한 해방지구에서의 토지 개혁 실시강령 발표

7월 6일 목 12일차,경상남도 지사,불법기부 강요를 엄금하는 담화 발표

7월 7일 금 13일차,이승만 대통령,북한군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라고 명령

7월 9일 일 15일차,미 8군사령부 대구에 설치

7월 14일 금 20일차,국군의 작전지휘권,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

7월 19일 수 25일차,북한군,전북 이리 점령,북한군,영덕 점령

7월 20일 목 26일차,대전 상실,미 제24사단장 딘 소장 실종

7월 22일 토 28일차,북한군 제6사단,전북 정읍을 점령

7월 23일 일 29일차,북한군,광주 점령,순천에 접근

7월 27일 목 33일차,미군,영동터널 폭격으로 북한군 대부대 궤멸,채병덕 소장 하동에서 전사

7월 29일 토 35일차,미국,장제스 타이완 국민당정부는 대외군원에서 제외

8월 3일 목 40일차,북한,남한 침략지역에서 1만 8,000개 농민위원회 조직

8월 6일 일 43일차,청년방위대,소속장교 긴급소집

                         타이완 국민정부 공군,진먼다오 대안 폭격,중국 선박 134척 폭침


    다음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청년방위대"가 설명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미군정하에서 창설되었던 국방경비대는 정규 국군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나,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국군의 전투력을 뒷받침할 예비병력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1월 30일 호국군을 창설하여 전국에 4개 여단, 10개 연대 규모의 예비병력을 확보하였으나 1949년 8월 <병역법>을 공포하면서 이를 해체하여 각 도의 병사구사령부로 흡수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미군의 잔여부대가 한국에서 철수를 완료할 단계에 이르는 등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세를 감안하여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20만의 민병을 양성하도록 지시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 겸 대한청년단장은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하여 청년방위대를 창설하였다.

창설의 법적 근거는 “청년에 대하여는 병역에 편입할 때까지 대통령의 정하는 바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병역법>에 의하여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대한청년단은 비록 군사단체나 민병조직은 아니었으나, 치안 및 반공활동을 전개하면서 청년간부들을 선발하여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로 보내어 40여 일의 단기훈련을 마치게 한 다음, 육군 예비역소위로 임관시켰다. 그 수는 제1기와 제2기생을 합하여 이미 700명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로 임명되어 전국의 청년단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청년단을 모체로 하여 등장한 청년방위대는 매우 빠른 시일 안에 전국적인 조직 구성을 완료할 수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11월 5일에는 육군본부 교도국(敎導局)이 청년방위국으로 개편되어 청년방위대의 업무를 지도하게 되었다. 12월 1일에는 충청남도 온양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설치하고 선발된 요원들에게 1개월의 훈련을 실시하여 방위소위로 임관시켰다.

특히, 대한청년단 배속장교와 호국군장교들은 우선적으로 선발되어 이 학교의 보수반에서 2주간의 교육을 받은 다음 청년방위대의 간부로 임명되었다. 이 학교는 그 뒤 수원으로 옮겨졌다가 1950년 6월 10일 간부양성의 업무를 마치고 문을 닫았다.

1950년 4월 말에 이르러 청년방위대는 각 도에 단(團:사단급)을, 각 군에 지대(支隊:연대급)를, 각 면에 편대(編隊:대대급)를, 다시 그 예하에 구대(區隊:중대급)와 소대를 거느리는 방대한 규모로 발전하였다.

6·25전쟁이 시작되자 무장과 훈련상태가 대체로 부실하였던 청년방위대의 조직은 흩어지고 말았으나, 수많은 대원들과 간부들은 모두 국군에 입대하여 조국수호의 사명을 다하였다.


8월 14일 월 51일차,미 제24사단,낙동강의 북한군 ㄱ격파 90m 진격

8월 15일 화 52일차,공산당 성토 웅변대회가 부산 부민관에서 열림

8월 22일 화 59일차,김태선 치안국장,철시하는 상인과 진찰 거부하는 의사들에게 대한 경고 담화

8월 23일 목 61일차,대구 북,서쪽의 북한군 총퇴각,해병대,인천항 밖 6개 섬 점령

8월 25일 금 62일차,해군,진해에 장충단을 설치하고 전몰장병 영령 봉안

8월 28일 월 65일차,미 공군폭격기대,성진 금속공장에 폭탄 326톤,진남포 공장지대에 폭탄 284톤 각각 투하

8월 29일 화 66일차,국군 해군,북한군을 가득 태운 발동선 2척 남해상에서 격침

8월 30일 수 67일차,백낙준 문교부장관,전시 학교 임시운영 조치 대책 발표

                           애치슨 미 국무장관,북한군 철수하면 유엔군이 38도선 북진하지 않을 ㄱ서이라고 공개 언명

8월 31일 목 68일차,정부,한국 배제한 국제회의의 한국 문제 처리에 반대 성명

9월 1일 금 69일차,여자의용군(교육대) 창설(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

9월 2일 토 70일차,최신식 패튼 전차 첫 전선 배치

                         정일권 계엄사령관,대구시내 고의 철시업자에게 개점 명령

                         맥아더,만주에 있는 한국인을 공산군에게 징발 편입시키는 징조가 있다고 유엔에 3번째 보고

9월 5일 화 73일차,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유엔군이 만주국경선까지 진격할 경우 참전 입장 표명

9월 10일 일 78일차,국군 제1사단,팔공산에서 북한 제1사단 격퇴

9월 11일 월 79일차,국회,이재민 수용대책 등 논의하기 위해 비밀회의 개시

9월 12일 화 80일차,해병대사령부 해병제1연대,신무기로 완전 무장하고 인천상륙작전 위해 부산 출항

9월 13일 수 81일차,이승만 대통령,38선은 자동소멸되었다고 언명


9월 15일 금 83일차,유엔 해병대,인천상륙 개시

9월 17일 일 85일차,조병옥 내무부장관,공비지역 동포에 포고,애국지사 한훈 사망

9월 19일 화 87일차,이승만 대통령,인천상륙 축하식에서 한국통일 방해 불허,국군은 한만국경까지 진격 명령

9월 21일 목 89일차,중항고등군법회의,한강철교 폭파 책임을 물어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사형 선고

                           (1964.11.14 가족의 재심청구로 무죄 선고)

9월 23일 토 91일차,김일성,북한군 총후퇴명령 하달

9월 24일 일 92일차,인천에 정부의 임시연락처 설치

9월 28일 목 96일차,이승만 대통령,탈환지역에서 사적 원한에 의한 타살 구타 금지 등을 촉구하는 성명

                           김일성,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 주재,중국과 소련에 직접적인 군사원조 요청하기로 결정

10월 1일 일 99일차,맥아더,북한군에게 항복 촉구

                           김일성,마오쩌둥에 파병 요청

10월 2일 월 100일차,이기붕 서울시장,서울 수복을 계기로 공유재산 반환과 부역자 신고에 대한 포고 발표

10월 4일 수 102일차,인도,황마포대 40만 개 한국에 제공

10월 6일 금 104일차,서울시,쌀 1일 1인당 1홉 4작씩 무상 배급 실시,수돗물 공급 재개

10월 7일 토 105일차,미군부대 38선 넘어 진격,미 제1기병사단,개성 점령

10월 8일 일 106일차,중공군,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 및 출병 명령 하달

10월 22일 일 120일차,정부,평양에 식량 공수 개시,평양에 새로운 시장 임명,서울-평양 전화 개통

10월 26일 목 124일차,중공군 본대 추가 압록강 도하 개시(제50군,제66군)

10월 31일 화 129일차,최순주 재무부장관,지방장관회의에서 세제개혁 단행 방침 천명



 

 

12월 4일 월 163일차,맥아더,중국이 북한에 100만 대군 집결중이라고 언명

12월 9일 토 168일차,맥아더,흥남에서 미 제10군단 해상 철수,부산 마산 울산으로 부대 이동시켜 제8군 사령관 지휘하에 편입하라고 명령,혜산진에 돌입한 미 제7사단 소속 17연대 및 국군,중공군에게 포위



1951년 신묘년 단기 4284년

1월 3일 수 193일차,정부 및 국군 수뇌부,부산으로 이전

1월 4일 목 194일차,국군,유엔군,서울 철수

1월 5일 금 195일차,애국지사 서재필 사망

1월 8일 월 198일차,이승만,국민에게 '인해전에는 인해전으로'라고 호소,

이승만 특별담화,애국재정가의 총궐기와 부인들의 협력 당부

1월 20일 토 210일차,공보처장관,일선병사를 후원하자 방송

1월 28일 일 218일차,헌병사령관 최경록 준장,간상모리배에 경고 담화

1월 31일 수 221일차,정부,워커 장군 전사 관계 운전사 3년형,기타 무죄 발표

북한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전사

2월 2일 금 223일차,전시 행정사무처리 간행령 실시

2월 6일 화 227일차,김훈 상공부장관,수입에 중점 둔 한일통상 재체결 발표

2월 8일 목 229일차,경북지구 계엄민사부장 이순영 대령,무허가 요정 음식점 및 유흥 경고 단속 담화

식량배급 실시,일반 1.5홉,공무원 2.5홉,특수공무원 5홉

김일성,북한군 건군 3주년 기념식에 전군에 격문

유엔총회,미군기의 중국 영토 폭격 결의안 부결

2월 20일 화 241일차,김윤근 국민방위군 사령관,국민방위군 비난에 대하여 해명 기자 회견


다음백화사전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6·25전쟁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면서 100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남쪽으로 후송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이 점령함에 따라 병력보충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지난날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사전대응책이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국회에 상정, 같은 해 12월 16일 이 법안을 즉시 공포하여 발효시켰다.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에 따라 경상남도·경상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청년들을 수용했다. 국민방위군 지도부는 극우단체로서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던 대한청년단의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국민방위군 예산은 1951년 1월 30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방위군 총인원을 50만 명으로 추산하여 3개월분 총 209억 원을 책정하였지만 1인당 배당액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실제 예산이 배당되는 과정에서 생긴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횡령에서 발생했다. 이때문에 식량과 침구를 지급받지 못한 방위군 5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영양실조에 걸렸다. 부당한 처우를 참다 못한 방위군들은 집단탈출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 분노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 정부는 형식적인 조사만을 실시, 방위군 간부 몇 명만을 기소하여 징역 4월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함으로써 사건을 축소시켜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국회의 재조사 과정에서 엄상섭 의원의 폭로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이 방위군 예산 10억 원을 착복하고 이승만 개인의 정치 조직에 수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밝혀지자,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서를 냈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물러났으며 김윤근·윤익헌·강석한·박창언·박기환 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총살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부 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이승만의 지지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상납된 돈에 대한 수사는 착수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전쟁의 와중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월 23일 금 244일차,중국 상하이 시민, 북한 난민구제금 114억 7,824만원 북한 송달

2월 28일 수 249일차,정일권 계엄사령관,징발된 차량 동원 해제 발표

3월 5일 월 254일차,정부 발표,토지개혁법에 따라 지난해 120만 소작인에게 토지 분배

3월 6일 화 255일차,조병옥 내무부장관,농촌 피란민의 수복지구 귀환 허가

3월 11일 일 260일차,정부,피란민 구호 위해 복표 발행

3월 12일 월 261일차,중공군,서울에서 퇴각 개시

3월 13일 화 262일차,린뱌오 휘하 15만명 및 서남국경지대 2만 중공군,한국 파견 명령으로 북향설

3월 17일 토 266일차,김일성,최후까지 싸운다고 스탈린에 서한


****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것을 옮겨 적는데 손가락 아프다.

       그만 적어야겠다.기억에서 사라져도 별 수 없지....(2016.6.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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