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담론

덕헤옹주(2016-08-06 화)

무논골 2016. 8. 9. 07:09

내가 산 책이 아니었다.

딸아이가 5~6년 전에 샀다.

한때 읽으려 했다가 무슨 연유인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책장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생각이 났다.


8월 7일 아리랑시네마에서 조조 영화를 보고 집에 오자마자 이책을 생각해내고 읽기 시작해서

8월 8일 밤 12시 36분에 독료한 책이다.


다른 때와 달리 시대적 메세지를 읽지 않고

덕혜와 다케유키라는 여자와 남자 관계를 섬세하게 살피면서 순식간에 읽었다.


 

 

작가 권비영 선생님도 잘 모르는 분이었다.

인터넷을 보니 안동에 사시고 소설 덕혜옹주는 100부나 팔린 책이라 한다.

영화 덕혜옹주는 소설 덕혜옹주가 원작이라는데 권비영 선생은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 관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많이 달랐다.

어차피 소설 작가나 영화 감독이나 각기 다른 매체로 창착을 하는거니까...


일본군의 앞잡이라는 꼬리표를 자랑스럽게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자들,

1909년은 그런 시대였다.힘을 가진 자가 득세하는 세상.권력의 그늘은 생각보다 안온했고,

일본에 빌붙은 개화파들은 왕실조차 뒤흔들었다.

제천 댁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어떠한 말로도 그를 돌려세울 수 없음을 알았다.

고종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두기 위해 청량리 홍릉에 안장했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치했다.

우리 아지는 못하는 것이 없구나.

바람에도 귀가 있다는 궁중에서 첩자를 가려내는 일은 불가했다.

양 귀인

즉조당에서 연회를 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용정에서 보이는 주합루의 신록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잘 것 없는 말들을 견디는 게 궁안의 생활입니다.

김황진은 커피를 입에 대는 황제를 볼 때마다 불안했다.

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부르지도 않은 한상학이 들어섰다.

충신을 지켜내지 못한 군주라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이젠 소작도 못해 먹고 하루하루 빌어먹고 살아야 하니.

독립투사에게 가족은 죄의 근원이라 들었소

옹주의 생활은 점점 더 일본 색으로 물들어갔다.

영친왕과 일본귀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근견식이 있던 날엔

의친왕의 상해탈출 미수사건이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를 어디에 쓰려고......

저리 정 깊으시니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가꼬.

일본 순사에게 끌려갈 뻔했던 허복순은 열세 살이었다.  

매를 맞다가 요금문으로 죽어 나가는 나인들이 수두룩하다 들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슬픔에 빠져 지냈다.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 슬픔은 치유할 수 없었다.

제 상처는 자신이 핥아야 했다.덕혜는 그것을 스스로 체득해가고 있었다.

영친왕은 덕혜를 정신병원에 데려가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즐겨 읽었다.

만지작거리던 떨잠을 저만치 밀쳐두며

아마도 화학비사법 같구나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조직의 비밀만 누설해버렸다.

하까마를 입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다케유키가 덕혜의 옷차림을 보며 

그들은 사사건건 부딪쳤다.덕혜는 자기주장이 강했고 다케유키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고집이 셌다.

오늘은 만송원에 들러서 오미구찌 점도 보고 와타츠미 신사에도 가봅시다.

사랑이란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 말이오.

순명  

고젠사마라 불렀다.고젠이란 옛날 여성에게 붙이던 경어였다.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의 황녀는 그렇게 세상 속에서 잊혀져갔다.

미친 척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야수만도 못한 놈들에게 당했다 해도 죽을 수는 없었다.

대공습 시기가 되자 다케유키에게도 소집령이 떨어졌다.

아무도 덕혜를 따르지 않았고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잠과 죽음이 무어 다를까

다케유키는 고심 끝에 덕혜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양덕혜

김장한

김을한 기자

2016.8.12 금 밤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