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왔다.
건우나눔자리 봉사자 선생님들과 아이들이다.
서로 행복한 시간에 나도 낄 수 있어 참 좋다.
살면서 오해를 많이 한다.
내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내 귀에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란 말이 들리면서
왜 그게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하곤했다.
박물관의 명칭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구태여 한옥~~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심결에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오늘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와서 둘러 보고는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은평 뉴타운 건설을 하면서 발굴된 유물을 보존하고
지역 사회 역사를 알 수 있게 꾸며진 공간이다.
오늘은 내 손길과 눈길이 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었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리라~~
집에 와서 홈페이지를 보니 관장님께서는 권위있으신 분이다.
아리랑 연구자~~
학교 다닐 때 한 과목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건축개요 및 시설규모
· 위 치 : 서울시 은평구 연서로50길 8(진관동)
· 대지면적 : 6,530.00㎡
· 건축면적 : 886.27㎡
· 연 면 적 : 2,901㎡
· 층 수 : 지상3층
· 주차면수 : 26면(장애인 2면, 여성전용 2면, 대형 3면)
박물관 연혁
· 2014.10 개 관
· 2014.06 건축 및 전시공사 준공
·
2012.09 박물관 건축공사 착공
·
2010.01 건축 및 전시 현상설계공모 및 당선작 선정
·
2004.06 은평뉴타운 내 문화시설 확충계획 연구용역
은평의 역사를 개괄하였다.
이 지역에는 서울 외곽을 지키는 한양군(漢陽軍)이 있어서 한양(漢陽)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배운 바와 좀 앞뒤가 다르다.
~陽(양)이란 강의 북쪽 산의 남쪽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배웠다.중국의 낙양이니 조양이니 우리나라 밀양이니 함양이니 등등의 예처럼.
그러니 한양(漢陽)이란 한강의 북쪽을 가르키는 지명이며,이 지역을 지키는 군대를 가르켜 한양군이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타당할듯싶은데....
묘지석
조선시대 역참제도
역과 역 사이에 참이 있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한참만에~~'라는 말의 참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을 해주시낟.
은평 뉴타운 건설시에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렇게 박물관이라도 세워서 보존하고 역사를 존중해주니 다행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시대 각 고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편찬한 것.
지금 펼처진 곳은 지금의 은평구에 있었던 옛 연서역과 금암참에 관한 부분이다.
박물관 내 금암기적비 탁본 사진
금암기적비에 대한 안내문
아래는 다음에서 위키피디아 검색한 "금암기적비" 기사이다.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조선 정조가 1781년 8월 증조할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 사적 제98호)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5~1776)의 옛 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써서 건립한 비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금암은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이었다. 정조는 1781년 8월 명릉을 참배하는 길에 금암에 이르러 할아버지 영조가 남긴 자취를 둘러보고 경기도관찰사에게 오랜 세월에 스러진 참사를 새로 짓고 빈터를 닦아 비를 세우도록 했다.
현재 참사는 없고 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이 얹혀있다. 비문 말미에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 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 敬製敬書 十五日立)라고 했듯이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것이다. 글씨는 단정한 정자체로 18세기에 유행되던 서풍이다.
비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있었을 때인 경종 원년(1721) 8월 15일 부친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사(農舍)에서 닷새 동안 머물렀다. 장차 대궐로 돌아가 기거하기 위해 말 한 필과 시동(侍童) 두 명을 데리고 저녁에 출발했는데,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고 불도 없어 금암(黔巖)의 참사(站舍)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내를 건너고 있었는데, 뒤따르던 사람이 도둑이라고 알렸다. 영조는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참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작년의 흉년으로 기한(飢寒)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밭을 갈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리이나 그 또한 직책이니 그대가 처리하라”고 했다. 이에 참장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적을 관청에 알리지 않았다. 날이 밝자 길을 떠나 도성에 도착했는데, 이미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어 학가(鶴駕, 세자의 수레)가 궁문 밖에서 의례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영조 32년(1756년) 봄 영조는 명릉에 일이 있어 거둥하는 차에 그 참사에서 다시 머무르게 되었고, 이에 이성신을 찾았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 이인량(李寅亮)을 찾아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아비의 옛 관직을 주어 세습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1721년 8월 15일 숙종(1661~1720)의 회갑을 맞이하여 명릉을 참배한 뒤 농사에 머물며 한 마디 말로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던 그날이 바로 세제에 책봉되던 날이었음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운 인연이며, 50여 년간 재위하며 세상에 많은 은덕을 베푼 치적의 징조가 바로 그것이었다고 찬미하였다.
상서로운 저 붉은 구름 금암 위에 떠 있네 霱彼彤雲 維巖之上
땅은 비를 피한 듯 산은 무늬돌을 숨긴 듯 地疑避雨 山似隱碭
임금 수레 빛나니 모든 신령 달려와 지키네 重輪發輝 百靈奔衛
비석 오래 남으리니 영조 할아비 쉬신 곳에 龜頭不泐 英考攸憩
고은 시인의 특별전시실
매혹
박물관 옥상에서 북한산 줄기를 바라보다.
박물관 옥상과 붙어있는 산자락에 정자가 앉혀있다.
튼튼하고 맛갈스럽다.
정자의 처마로 보이는 산줄기
한옥마을
박물관에 대한 이해를 했는데 아직도 궁금하다.
오해를 하기보다 내 견해를 주장하기 보다 의문으로 남겨두자.
왜 한옥마을을 이곳에 조성하려했을까?
'서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몽촌토성(2017-09-30 토) (0) | 2017.10.03 |
---|---|
서울 백석동천-북악팔각정-북악숲길(2017-08-20 일) (0) | 2017.08.21 |
관악산에서 현충원까지(2017-3-26 일) (0) | 2017.03.27 |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2016-09-27 화) (0) | 2016.09.27 |
서울 용산 쟁기념관(2016-09-15 목,추석) (0) | 2016.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