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성지~ 국립 419묘지
612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유세차량이 사진에 찍혔다.
중국에서 유학온 젊은이
419묘지
4월학생혁명기념탑
사월학생혁명기념탑
국립 4·19민주묘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21m의 화강석 탑주 7개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4·19혁명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국민의 성금과 국고보조로 1963년 9월 20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옮겨온 글)
조형물
419의 힘을 보라
(수호예찬의 비)
묘지와 묘지 앞 조형물 만장(輓章)
높이 7m의 화강석 탑주 20개로 구성
높이 7m의 화강석 탑주 20개로 구성
유영봉안소
정의의 불꽃
4·19혁명의 역사적인 의미를 불꽃형상으로 표현. 사각의 기념비적이고 수직적인 형태 안에 불꽃의 형상을 투각 하여 3개의 무궁화 꽃잎 을 상징하는 반원형의 형태가 그 수직적인 형태를 부드럽게 감싼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타 조형물과 연계하여 결실의 완성적 의미를 표현.
13 X 5.6 X 10m 화강석
북한산자락에 고이 잠기어 있다.
기념관 위 옥상에서 산줄기를 바라본다.
전국 곳곳에 기념탑
419를 나와서 둘레길 가다 다시 고개돌려 보게되는 419
심산 김창숙 선생 묘
중국인 젊은이를 이곳으로 안내하였다.
살짝 돌아가기는 하였지만 그에게 한국의 유학자 및 독립운동가의 체취와 분묘 형식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창숙 선생의 글
번역하려했는데 실력이 없고
번역글을 찾아보니 찾을데가 없다.1986년도 심산사상연구회에서 펴낸 책에도 원문은 없이 한글로만 되어 있으니
이게 그건지 그게 이건지 알 수 없다.
인터넷에서 발췌한 글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인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묘이다. 손병희, 신익희, 이시영, 이준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가운데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1962년 사회장으로 예장된 김창숙은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묘지의 지정면적은 728㎡이다. 그의 묘지에는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 망주석 2기, 묘비 등이 갖추어져 있다.
1963년 5월 세운 검은 대리석 묘비의 앞면에는 ‘유한심산선생김창숙지묘(有韓心山先生金昌淑之墓)’라 새겨져 있고, 한글과 한문으로 비문이 적혀 있다. 비문의 글은 국문학자 이가원(李家源)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가 썼다.
봉분 둘레에 돌려 쌓은 호석(둘레돌) 일부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김창숙의 공훈을 기리고 그의 애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있다.
2012년 10월 19일 등록문화재 제518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4
그 젊은이도 중국인 중에서투사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메모를 하지 못해 잊었다가 이 블러그를 기록하면서 그에게 위챘을 했더니 방학을 맞아 중국에 있다는 것이고...
장태염(章太炎) : 중국 동맹회의 초기 중요한 인물로 손중산 宋敎仁 등과 만청황족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한 투사이다.
위와 같이 답이 왔다.
아래는 위키피아에서 찾아본 장태염에 관한 글이다.
위 심산 선생 비문에 손중산 장병린~ 이라는 글이 보이는데 바로 장병린이 장태염이다...
장빙린(章炳麟, 1868년~1936년)은 중국 청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학자이자 혁명가이다. 저장 성 여항현(余抗縣) 출신이다. 자는 매숙(枚叔). 호는 태염(太炎)이다.
소년 시절에 일찍이 배만의식(排滿意識)에 눈떴다고 한다. 청년 시대에 유월(兪越)에게 사사하여 고증학을 수학하고, 《좌씨전(左氏傳)》을 연구한 뒤에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공양학파(公羊學派)와는 학문상의 견해를 달리하여 곧 그들과 결별하였다. 무술정변 후 한때 일본에 망명하여 개혁파를 떠난 채 배만운동(排滿運動)을 결의하였다. 〈구서〉에서 강렬한 배만사상을 표명한 데 이어 〈박강유위론혁명서(駁康有爲論革命書)〉와, 추용(鄒容)의 저서인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청조를 매도하여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는 불전(佛典)을 연구했다. 또한 저장(浙江) 계통의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출옥 후 도쿄에 가서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혁명을 맹렬히 고취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정치에 반대하였고, 쑨원(孫文) 등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뒤에는 정계를 떠나 국학(國學)의 연구와 유지에 전념하여 민국의 학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가로서의 그의 특색은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종족혁명주의(種族革命主義)에 있고, 쑨원 등의 서구적·근대적 혁명이론을 승인하지 않았다. 학자로서는 고증학의 정통을 자부하였고, 특히 소학(小學) (현학·훈설(訓說)·音韻學)에 상세하며, 음운학의 권위로서 불교에도 통하여, 고증학·제자학(諸子學)·불학(佛學)을 망라한 국학을 주장하였다. 그 학풍은 혁명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이다.
저서로는 전술한 것 외에 <문시(文始)>, <신방언(新方言)>, <소학문답(小學問答)>, <검론(檢論)>, <국고론형(國故論衡)> 등 대단히 많다. 이것들은 <장씨총서(章氏叢書)>, <동속편(同續編)>, <태염문록(太炎文錄)>, <동속편(同續編)>에 대체로 수록되어 있다. 루쉰(魯迅), 저우쭤런(周作人), 첸쉬안퉁(錢玄同) 등이 그의 훈도를 받았다.
(작성일 : 2018.7.1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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