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묘 옆에 태학이라고도 불리는 국자감이 있다.
옛 전례대로 하면
남북으로 배치할 때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다.앞쪽으로 사당을 모시고 뒤에 공부하는 곳을 배치한다는 뜻이다.
동서로 배치할 때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이다.오른쪽인 동쪽에 사당을 모시고 서쪽에 공부하는 곳을 배치한다는 뜻.
여기 북경에는 좌묘우학의 배치를 하고 았다.
나는 공묘를 둘러 보고 쪽문인 지경문으로 연결되는 태학으로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태학의 정문으로 나왔는데
아래 사진은 내 경험상의 시간과는 달리 배치되어 있다.
태학문
국자감의 정문에 "태학"이리고 적혀있다.
한나라 때 태학을 설치한 이래로 "태학"은 곧 국가 최고학부의 명칭이다.태학문은 국자감 주요 교학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원래 양측에는
명대 <오조상유비>와 청 순치 <효시생원부비> 등 7건의 엄격한 교육운영에 관한 비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건륭석경으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국자감은 태학,국학이라도 하며 원 명 청에서 최고 학부이자 교육행정관리기구로서 원나라 지원24년 1287년에 창건했으며 명나라 때
대규모 중수가 있었다고 적혀있다.
유리패루
건륭 49년 1784년에 세워졌다.오로지 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문이다.
앞에는 환교교택圜橋敎澤,뒤에는 학해절관學海節觀이라고 편액이 건륭황제의 어필로 적혀있다.
圜은 둥글 원,두를 환으로 읽는다.
정확한 뜻을 모르겠지만 아래 벽옹壁雍의 풍경과 황제의 교화를 묘사한 글인듯하다.
어느 중국인 학자는 이렇게 적어놨다.
”圜桥教泽“就是指后面辟雍四面环水,水周流不断,象征教化不息。为了便于出入,又在辟雍四面各架一座桥梁。
而”学海节观“则是指学生众多,皇帝临雍视学时不得不靠水将学生分开。
벽옹을 두르고 있는 연못과 다리
벽옹
국자감의 주 건축물이다.
이곳 국자감과 마찬가지인 우리 나라에는 성균관에는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다.
琉璃牌楼后的辟雍是国子监的主体建筑,重檐黄瓦攒尖顶,廊柱外有一周檐柱,上部装饰雕花板,所以看不到下檐的斗拱,室内方三间,采用抹角梁的做法省去了中间四柱,扩大了内部空间的视觉效果,使得内部俞显宽阔。
室内还有三方匾额,
北面的“雅涵於乐“是乾隆五十年皇帝所书;
南面题”涵泳圣涯“,为道光三年皇帝所书;
东面是”万仰镜流“,是咸丰皇帝所书。
室内的宝座专供皇帝临雍视学所用。
辟雍等级很高,基本上都是金龙和玺彩画。外部有圆形水池包围,东西南北四面有桥,分别与辟雍的四门相对。
辟雍是乾隆五十年恢复的一大礼制壮举,从隋唐不再见于中国国子学的辟雍重现天日,虽然越南也有国子监,韩国有成均馆,日本有昌平坂学问所,但都是只有明伦堂或讲堂,没有辟雍,北京国子监辟雍是世界上唯一的国家最高学府的礼制建筑。
“辟雍”出自《诗经·大雅·灵台》:
“经始灵台,经之营之。庶民攻之,不日成之。经始勿亟,庶民子来。王在灵囿,麀鹿攸伏;麀鹿濯濯,白鸟翯翯。王在灵沼,於牣鱼跃。虡业维枞,贲鼓维镛。於论鼓钟,於乐辟廱。於论鼓钟,於乐辟廱。鼍鼓逢逢,蒙瞍奏公。”
当年辟雍的设计建造和刘墉、和珅分不开,刘墉博览群书,将失传近千年的辟雍重现于世,而和珅巧妙地揣度圣意,用抹角架海梁的方法省去了周长12米的室内的四根柱子,有效地扩大了作为皇帝视学时使用的辟雍的内部空间。辟雍的供水来自四口水井,除了上文所提到的集贤门后的两口,还有分别位于率性堂和修道堂后的两口。
辟雍后面的彝伦堂曾经是国子监的主体建筑。皇帝在此临雍讲学,新进士在此举行释褐礼。明代讲学频繁,“每旦,祭酒,司业坐堂上,属 官自监丞以下,首领则典簿,以次序立.诸生揖毕,质问经史, 拱立听命.惟朔望给假”(《明史•志第四十五》)。
清代讲学活动减少,只在每月初一、上旬、十五、望后举行四次。
황제의 글씨와 보좌
임옹강학도
건륭황제가 벽옹에 와서 학생들에게 강학하고 있는 그림이다.
위 유리패루에 있는 편액 학해절관學海節觀은 이를 묘사했는듯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셀카로 내 벽옹 친림에 대한 흔적을 남긴다.
이윤당彛倫堂
벽옹 뒤에 있는 건물인데 벽옹을 지어 이윤당의 기능을 대체하였다.
彝伦堂面阔七间进深三间,灰瓦悬山顶,前面屋檐下悬挂由康熙皇帝所书的彝伦堂堂匾(由故宫博物院所藏的明代徐显卿宦迹图可知明代彝伦堂所悬的是竖挂的额,即斗匾)。
室内减去了中间的两根金柱以便举办各种礼仪活动,减柱的建筑方式也见于两侧的耳房中,中间前面的两根金柱被减去,是为东西讲堂。堂前有月台,月台东南有日晷,西南有嘉量,都是古代衙门前的必备摆设物。
彝伦堂的东西两侧是国子监的六堂,六堂在明代是用来划分学员级别的教学场所,《大明会典》卷二百二十:“凡生员通四书、未通经者,居正义、崇志、广业堂。一年半之上,文理条畅许升修道、诚心堂。坐堂一年半之上、经史兼通、文理俱优者、升率性堂 。”大致就是先西后东,继而先南后北。
到了清代取消了升级制,六堂都为一级,如同现代学校中的六个班级。每堂设一名助教和一名学正负责教学和管理。雍正年间扩充南学后,南学逐渐成为了教学场所,北学六堂成为收藏十三碑刻的陈列室。
집현당集賢堂
십삼경 건륭석경
장형이라는 서예가가 12년의 세월동안 유가의 13경전 63만자를 돌에 새겼다.
十三经碑刻是历史儒家经典刻碑中最完整的一部,也是世界上最大、最重的一部书。
经书由蒋衡花费十二年的时间书写而成。
<십삼경 석각 내역>
国子监内有十三经刻石碑共190座,原置放于东西六堂,现位于国子监与孔庙的夹道之内。
石碑上所刻的十三经包括:《周易》、《尚书》、《诗经》、《周礼》、〈仪礼〉〈礼记〉、〈春秋左传〉、〈春秋公羊传〉、〈春秋谷梁传〉、〈论语〉、〈孝经〉、〈孟子〉、〈尔雅〉,共63万余字。
经书由蒋衡花费十二年的时间书写而成。乾隆皇帝命和珅为主刘墉为副安排考订蒋衡所书的经书并动工刻石。这部十三经刻石成于乾隆年间,故又被称为“乾隆石经”。
<十三经 刻石 용도>
十三经刻石原置于国子监六堂之前,以为师生学习研讨之用,后因国子监翻修改陈于国子监与孔庙之间的夹道内。
国子监内有十三经刻石碑共190座,国子监第一任祭酒是元代著名理学家许衡,当时有学生200余人。在这里学习的学生叫“监生”,大致有三种来源:一是从全国各地秀才中选拔的正途监生,到此作进一步深造;二是外国留学生,大致来自高丽、逞逻、交趾、俄罗斯等;三是“捐监”,挂名监生,只要交足银子,就能领取“监照”,算是监生。
건륭석각을 쓴 장형
蒋衡,又名振生,字湘帆,一字拙存,号江南拙叟,又号函于老布衣,江苏金坛人,生于清圣祖康熙十一年。
卒于高宗乾隆八年,年七十二岁。少为诸生,试辄不利,乃肆力于古,复博涉晋、唐以来各家名迹,积学既久,名噪大江南北。
性好游,足迹半天下,所至赋诗作书,歌啸不能自已。尝入关,年羹尧招至幕下。
偶游碑洞观诸石刻,慨然以为《十三经》自任,凡八十余万言,阅十二年而成。装璜成三百册,五十函,高斌特疏进呈,授国子监学正街,当为经时,以恩贡选英山教谕,又举博学鸿词,皆力辞不赴,衡善书法,有《拙存堂临帖》二十八卷,著述有《拙存堂诗文》及《易卦私笺》二卷,(均清史列传)传于世。
在北京国子监街的孔庙里,有一中国文化艺术宝库中的稀世珍品《乾隆石经》,上面刻着春秋战国至西汉初的十三部儒家经典著作,记载了夏、商、周以来我国古代历史、哲学、诗辞和典章制度,全部刻石189块加“谕旨”造成表文1碑,共190块,80万字。碑文楷书遒劲茂美,其规模之巨,书法之精,令世人惊叹。这手书作者就是清代著名书法家、金坛人蒋衡。
대학
국자감의 맨 뒷쪽에는 유구학관의 터라는 안내문이 있었는데 중국과 유구 간에 문화교류가 오래되었으며,
유구국에서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에게 독서와 생활을 제공했다는 내용이다.
국자감 구경하고 나와서 잠시 거리를 걸었다.
물 2원,바나나 6원
정식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 쌀국수 15원 (13:57)
화려한 식당은 아니지만 정갈하였다.
고루鼓樓를 지나가고 있다.14:25
고루
내려서 볼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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