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신해혁명(2018.9.23 일)

무논골 2018. 9. 23. 15:35

추석을 앞두고 휴가가 길어서 지루하기도 하지만 여유롭기도 하다.

지루함과 여유는 같은 상황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다른 표현은 마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월 초에는 중국으로 여행을 간다.

중국 역사 속 한 장면에 주인공인양 들어앉는 여행일 것이다.

중국을 이해할 요량으로 영화 한 편을 본다.


신해혁명

내 의식 속에는 혁명이라면서도

마치 대한민국의 촛불혁명 정도로 매우 평화로운 운동 정도를 생각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군대와 군대의 충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전쟁/액션 중국, 홍콩

2012.03.15 개봉 120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장려, 성룡 (주연) 성룡, 조문선 






대륙의 역사를 바꾼 전쟁

1911년 쑨원과 동맹회의 혁명 동지들은 말레이시아에서 광저우 봉기를 계획한 뒤 헤어진다.
그러나 봉기 당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사교클럽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쑨원에게 날아온 봉기 실패의 전보. 봉기는 실패하고 수많은 동맹회 회원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쑨원은 본토 쓰촨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중의 철도보호운동에서 혁명의 불빛을 다시 느끼고,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한 병사의 총성으로 시작된 우창 봉기로 대륙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데….

(다음 영화에서 일부 발췌)


1912년 2월 12일 황제 퇴위


혁명이란 무엇인가?


 민중을 배부르게 하고~~


혁명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영화 막바지 스틸사진....


동맹회 광주봉기 실패

2011년 10월 16일 공영8군영에서 무력이 일어난다.

손문은 미국에 있다.

청나라가 차관을 도입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무력으로 혁명을 저지할 것을 염려하여 열강에 호소한다.

청나라에 차관을 주지마라고...

손문은....사심이 없다.

2012년 2월 12일 황제 퇴위

2012년 2월 13일 총통 사임

민족 민생 민권

광복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2018.9.22 토,촛불혁명을 부정하는 분위기 집회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2018.9.22 토,촛불혁명 옹호하는 분위기 시위자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2018.9.22 토,축제를 즐기는 시민들


================================================================================

무창 봉기

1910년 2월에 광주 봉기가 실패한 데 이어 여러 차례의 혁명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고

1911년 7월 31일 상해에서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한데 이어 무한 지방에도 호북분회를 설립하여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봉기 준비를 서둘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신군과 동맹회가 봉기했다. 이 봉기는 신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 오늘밤 12시를 기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을 부흥시킨다.
2. 전투·수비를 막론하고 기율을 엄수할 것이며 동족이나 외국 군인에 대하여는 철저한 보호를 가한다.
3. 각군은 중화문 밖에서 일어나는 포성을 신호로 하여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무창 시내의 청국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관공서가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무창 봉기가 성공한 것이다.

무창의 봉기 전투에서 전사한 혁명군은 결사대 소속 10여 명이었고, 부상자는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여원홍을 도독으로 추대한 혁명군은 마침내 역사적인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 자의국을 군정부로 한다.
2. 중국을 중화민국이라고 칭한다.
3. 한구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에 대하여 군정부가 외국인 보호의 책임을 질 것을 밝히는 바이며 동시에 군정부를 교전 단체로서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은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무창 봉기 2일 후인 1911년 10월 12일 오전 6시경 무창의 전화선이 복구되자 군정부는 즉시 도독 여원홍의 이름으로 전국에 무창 혁명의 성공을 선포하고 각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청조에 대하여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청군에 소속되어 있는 한족 출신 장병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청조는 원세개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하도록 명하였으나 그런 정도에서 쉽게 응할 원세개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섭정왕인 순친왕이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수염을 깎고 노동자로 변장하여 3등 열차로 어렵게 북경을 탈출하여 하남 땅 고향에서 권토중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원세개는 10월 30일에야 겨우 하남성 신양에 도착하여 음창으로부터 모든 군권을 인수하고 혁명군에 대한 회유공작에 착수하였다.


그 해 12월 2일 남경이 혁명군의 수중으로 들어오자 무창의 대표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남경으로 옮긴 후 7일 이내에 각 성 대표회의를 열어 10성 이상이 참석하면 임시 대총통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원세개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혁명파와의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계산하였다.
 

혁명파의 원로인 쑨원이 무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런던, 파리, 홍콩을 거쳐 12월 25일 상해에 도착했다.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그것은 청조에 대한 4개국 차관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공화정권에 대한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4개국 차관의 중심국이었던 영국은 쑨원의 요청에 따라 진행 중인 차관을 중지하고 새로운 은행단을 신정권에 파견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쑨원 16표, 황흥 1표로 쑨원이 압도적 다수의 득표로써 초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취임 선서에서 쑨원은 “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해 복무한다.”고 서약하였다. 새로운 공화국은 연호를 쓰지 않고 1912년을 민국 원년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유사 이래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 군주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의에 의한 정치와 민중을 위한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실현되게 되었다.




육군총장 황흥, 차장 장작빈(蔣作賓)
외교총장 왕총혜(王寵惠), 차장 위신조(魏宸組)
교육총장 채원배(蔡元培), 차장 경요월(景耀月)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


제1조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쑨원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자 곧 남경 교외의 명 효릉에 참배하여 한인의 국가를 회복했음을 보고했다.


대총통 쑨원은 “청제가 퇴위하고 원세개가 공화정에 찬동한다면 원세개에게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할 것임을 선언”하고 5개 조항의 최종안을 원세개에게 제시하였다.


1. 황제는 퇴위하고 원세개는 청국 황제가 퇴위했음을 북경 주재외국공사에게 통지한다.
2. 원세개는 공화주의를 절대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을 표명한다.
3. 쑨원은 외교단(外交團)에 대하여 청국 황제의 퇴위를 포고한 후 사직한다.
4. 참의원은 원세개를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한다.
5. 원세개는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된 후 참의원이 정한 약법을 수호할 것임을 선서한다.


2월 11일 원세개와 임시정부 사이에 청국 황실에 대한 처우 문제가 결정되었다.


1. 청국 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지 않고 외국 군주에 대한 예로써 대우한다.
2. 세비 8백만 냥을 신화폐로 환산하여 4백만 원을 중화민국에서 지급한다.
3. 황실의 사유재산은 중화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4. 미완성된 광서제의 능묘공사는 중화민국의 경비지출로 계속 공사를 진행한다.
5. 청국의 황족도 중화민국의 국권·사권(私權)에 대하여는 일반 국민과 동등하다.


서세창(徐世昌)이 조서에 옥새를 찍었고 퇴위 조서는 곧 선포되었다. 이로써 청조는 종지부를 찍었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당(2018.9.26 수)  (0) 2018.09.27
안시성(2018.9.26 수)  (0) 2018.09.26
리틀포레스토(2018.9.22 토)  (0) 2018.09.23
레인맨Rain Man(2018.9.1 토)  (0) 2018.09.02
마녀(2018.7.25 수)  (0) 2018.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