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제13차 중국여행 1/7일차 남경 부자묘夫子廟(2018.10.5 금)

무논골 2018. 10. 18. 19:52

강소성江蘇省 땅을 지나면서도 그 성회가 있는 남경南京을 경험하지 못하여 이번 여행에서 강서성江西省을

계획했으면서도 잠시일망정 구태여 남경을 들르고 싶었다.얼마전 읽은 삼자경三字經에서도 남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참이었구....


남경南京


당(唐)나라 때에는 금릉(金陵)·백하(白下) 및 금릉부 등으로 불리다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이변(李昪)이 강녕부(江寧府)로 개칭(937)한 뒤 남당(南唐) 20여 년의 도읍지가 되었다. 남송(南宋) 때에 건강부(建康府), 원(元)나라 때 집경로(集慶路)로 불리다가, 1368∼1421년에 명(明)나라 도읍지가 되어 처음에 응천부(應天府), 뒤에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현재의 난징의 명칭은 그때에 비롯되었으며, 현존하는 주위 34km의 성벽도 그때에 축조되었다. 1441년에 도읍지가 베이징[北京]으로 옮겨진 뒤에는 배도(陪都)로서 중시되었다. 청(淸)나라 때에는 강녕부(江寧府)로 불리고, 1853년부터 12년간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이 점령하여 천경(天京)으로 불렀으나 전란으로 황폐해졌다.


1842년에는 아편전쟁 후의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이곳에서 체결되고,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해 개항장(開港場)이 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결과 1912년에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여기에 수립되고, 1927년 수도가 되어, 특별시제(特別市制)가 시행되었다.


중일전쟁(中日戰爭)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왕자오밍[汪兆銘] 정권이 수립되었다가, 전후 국민정부(國民政府)가 복귀하였으나, 1949년에 중국공산군에 의해 점령되고, 중공정권 수립 후 장쑤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


시가지는 서쪽과 북쪽이 양쯔강에 면해 있고 북쪽에 무푸산[幕府山]·우룽산[烏龍山], 동쪽에 쯔진산[紫金山], 남쪽에 위화타이[雨花臺], 서쪽에 칭량산[淸凉山]·스쯔산[獅子山] 등이 솟아 군사상 요지를 이루고, 또 주변에는 후청강[護城河]·친화이강[秦淮河] 등 하천과 쉬안우호[玄武湖]·모초우호[莫愁湖] 등 호수가 있어 지형의 변화가 다양하다.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은 높이 13∼25m, 주위 34km에 달하여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는 세계 최대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징 [Nanjing, 南京(남경)] (두산백과)



남경남역에서 지하철로 이곳 부자묘역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무척 많다.피곤한 몸이지만 대충이라도 남경거리를 느끼고 겨우 구한 여관방은 300원이나 한다.

시설에 비해 비싸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관 옆에서 물 빵 우유 등 23.4원어치 사서 여관방에 들어와 좀 쉬니

피로가 회복된듯도 하였지만 나가서 놀지말고 휴식을 택했다.

밤(10.5 금)에 찍은 사진도 있고 다음날 아침(10.6 토)에 찍은 것도 있다. 


부자묘 인근 안내지도


부자묘를 비롯한 남경의 문물은 회하를 끼고 발달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강 왼쪽에서 주로 머물고

문덕교 너머로 오의항이나 왕도사안기념관에는 가지못했다.

아쉽지만 비행기 놓쳐서 첫단추가 잘못된 여행을 이렇게라도 수습하여 즐기니 다행이라 생각이든다.


늦은 밤 타국에서 나그네 되었어도 마냥 태평하기만한 모습,

그러나 속으로는 아직 잠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초조하기만 하였다.


지하철 부자묘역에서 내려 떠밀리듯 나오니 이곳 회하에 도달하여 유람선을 구경한다.




회하에 있는 유람선 저 앞에 보이는 다리가 문덕교일터이다.


바이뚜에는 진회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秦淮河,古名龙藏浦,汉代起称淮水。진화하의 고명은 용장포인데 한나라 때부터 회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相传秦始皇东巡会稽过秣陵,以此地有“王气”,下令在今南京市区东南的方山、石硊山一带,凿晰连岗,导龙藏浦北入长江以破之,到唐代,根据这一传说,改称秦淮。

전설에는 진시황이 회계지역으로 동순하여 지금의 남경시 지역인 말령을 지나다가 이땅에 왕기가 있다면서 명령하기를 지금의 남경시 동남의 방산,석위산 일대에서 언덕을 쪼아내서 용장포가 북쪽으로 장강에 들도하여 왕기를 깨뜨렸다는데

당나라 때에 이 전설에 근거하여 진회라고 고쳐불렀다.

后人指出:,实是。


唐杜牧《泊秦淮》诗行世后,秦淮河之名始盛于天下。

당나라 시인 두목의 《泊秦淮》가 세상에 유행하여 진화하의 명성이 비로서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烟籠寒水月籠沙  (연롱한수월롱사)   안개는 차가운 물결을 감싸고 달빛은 모래밭을 덮는데
夜泊秦淮近酒家  (야박진회근주가)   오늘밤 진회에 배를 대니 술집이 가깝네  
商女不知亡國恨  (상녀부지망국한)   기녀들은 망국의 비애를 알지 못하고
隔江猶唱後庭花  (격강유창후정화)   강 건너에서는 오히려 후정화 노래를 부르네


< 위 두목의 시는 최민화 선생의 블러그에서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choemh/16140981


李白《留别金陵诸公》诗中,也有

“六代更霸王,

 遗迹见都城。

 至今秦淮间,

 礼乐秀群英”的诗句,出现了“秦淮”河名。


 对此河之来历,《六朝事迹编类》载:“淮水……分派屈曲,不类人工,疑非始皇所开”,

经地质、考古学者证实,秦淮河属自然河道,非人工所烎。

但其中某些地段为人工所开凿,仍不能排斥。


최민화 선생의 블러그에서 진회하 사진을 보니 내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다시 가보고 싶은 물줄기이다.



고진회古秦淮 패방 (밤)


국경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다.


중국의 국경절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일 10월1일이다.

올해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쉰다.


나처럼 타향인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탕 15원어치를 들고......


사탕 10원어치 더 샀다.

생과일에 사탕을 입혔다.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입에 넣어주는대로 받아먹으니 먹을만하다.


고진회古秦淮 패방 (아침)


밤에 미어터지던 거리에는

새벽부터 거리를 정돈하는 청소부와 부지런한 여행객이 간간히 보이며 한산하다.








조벽의 용이 화려하다.


진회하 (밤)

저 너머로도 볼거리가 많다는데 가지못했다



진회하(아침)

조벽 너머가 오의항(烏衣巷)이라는 옛거리일 것이다.



밤새 회하에서 사람을 태웠던 배들은 아직 아침이 덜 깨었나보다.

아직 영업개시하기 전이다.



강남 제일의 풍류재자라는 당인唐寅

29세인 홍치11년(1498년)에 강남공원에서 향시에 응시하여 해원解元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입상이 있다보다.


唐寅 (明代著名画家、书法家、诗人)  


唐寅(1470年3月6日-1524年1月7日),生于成化六年二月初四,卒于嘉靖二年十二月二日。

字伯虎,后改字子畏,号六如居士、桃花庵主、鲁国唐生、逃禅仙吏等,南直隶苏州府吴县人。

明代著名画家、书法家、诗人。


唐寅的始祖是前凉凉州晋昌郡陵江将军唐辉,这也直接影响到了唐寅,他在自己的书画题名中也常用“晋昌唐寅”落款。

而到了唐初,其祖唐俭跟随李渊起兵,被封为“莒国公”,所以唐寅也自称“鲁国唐生”。


到了明代,其祖唐泰任兵部车驾主事,死于土木堡之役。唐泰的后代子孙多散部在苏州吴县白下、桥里间一代。

唐寅也正是出生在这一带,其父唐广德经营一家小酒馆。


其父让他读书求取功名,唐寅不负父望,十六岁中苏州府试第一入庠读书。

28岁时中南直隶乡试第一,次年入京应战会试。


因弘治十二年科举案受牵连入狱被贬为吏,

홍치12년 과거시험문제로 수감되는 일에 연루되어

낮은 관리로 좌천되었다,

突发变故让唐寅丧失进取心,돌발적으로 이런 변고는 당인에게 상실감을 주어

从此游荡江湖,埋没于诗画之间,终成一代名画家。이때부터 강호를 유탕하오 시화에 묻혀 지내며

마침내 명성을 이루었다.


绘画宗法李唐、刘松年,融会南北画派,笔墨细秀,布局疏朗,风格秀逸清俊。

人物画师承唐代传统,色彩艳丽清雅,体态优美,造型准确;亦工写意人物,笔简意赅,饶有意趣。

其花鸟画长于水墨写意,洒脱秀逸。书法奇峭俊秀,取法赵孟頫。

绘画上与沈周、文徵明、仇英并称“吴门四家”,又称“明四家”。

诗文上,与祝允明、文徵明、徐祯卿并称“吴中四才子”。


아침 한산한 부자묘 거리



(바이뚜에서 찾은 사진)


南京夫子庙 


南京夫子庙位于南京市秦淮区秦淮河北岸贡院街、江南贡院以西,即南京孔庙、南京文庙、文宣王庙,

为供奉祭祀孔子之地,是中国第一所国家最高学府,也是中国四大文庙,为中国古代文化枢纽之地、

金陵历史人文荟萃之地,不仅是明清时期南京的文教中心,同时也是居东南各省之冠的文教建筑群,

现为夫子庙秦淮风光带重要组成部分。

 

夫子庙是一组规模宏大的古建筑群,主要由孔庙、学宫、贡院三大建筑群组成,占地极大。

有照壁、泮池、牌坊、聚星亭、魁星阁、棂星门、大成殿、明德堂、尊经阁等建筑。


夫子庙被誉为秦淮名胜而成为古都南京的特色景观区,是中国最大的传统古街市,与上海城隍庙、

苏州玄妙观和北京天桥为中国四大闹市。

 

夫子庙始建于东晋成帝司马衍咸康三年(337年),宋景祐元年(1034年)改建为孔庙,

在六朝至明清时期,世家大族多聚于附近,故有“六朝金粉”之说。


范蠡Fàn Lǐ 범려、周瑜、王导、谢安、李白、杜牧、吴敬梓等数百位著名的军事家、政治家、

文学家有这里创造了不朽的业绩,写下了千古传诵的篇章。


南京夫子庙四毁五建,最后一次破坏于1937年侵华日寇的炮火中。

1985年夫子庙修葺xiūqì(수즙)后已接待游客一亿多人,平日接待游客在十万人次以上,

节假日均达三十余万人次上,是中国著名的开放式国家AAAAA级旅游景区,也是蜚声中外的旅游胜地。


부자묘 영성문 앞에는 조벽을 바라보고  "천하문추"라는 패방이 걸려 있다.


영성문을 뒤로 하여 대성문이 보인다.


대성앞에 아침 운동하는 시민들


담장 너머로 대성전 지붕이 보인다.

서시西市로 연결되어 있다.


대성전



서시의 아침


대성전 담벼락과 붙어 있는 동시東市



경건할 인상의 부자묘 바짝 붙어서 시장이 형성된 것이 특이하다.



존경각

경전을 보관하는 도서관인데...

여인들이 광장무를 추고 있다.


존경각 아래에는 '부자묘민간예술대관원'이라고 현판을 걸어 놨다.

인물이 바라보는 곳이 아악궁이라는 고건물이며 부자묘 일원이며 대성전쪽이다.

존경각이 대성전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용문



용문 뒤로 멀리 보이는 곳이 과거박물관


중국 과거시험장인 강남공원 앞에서


中国科举博物馆包含博物馆主馆、江南贡院南苑以及明远楼遗址区三大区域。博物馆主体是科举文化展示、体验的集中区;江南贡院南苑是科举博物馆主体的配套区域;明远楼遗址区主要是明远楼、至公堂、历代碑刻及部分号舍。博物馆主体两侧还建设有秦淮礼物店、游客服务中心等配套设施。


江南贡院位于南京市秦淮区夫子庙学宫东侧,又称南京贡院、建康贡院,是中国历史上规模最大、影响最广的科举考场,中国南方地区开科取士之地,也是夫子庙地区三大古建筑群之一,夫子庙秦淮风光带重要组成部分。  

江南贡院始建于宋乾道四年(1168年),经历代修缮扩建,明清时期达到鼎盛,清同治年间,仅考试号舍就有20644间,可接纳2万多名考生同时考试,加上附属建筑数百间,占地超过30余万平方米。其规模之大、占地之广居中国各省贡院之冠,创中国古代科举考场之最。


清光绪卅一年(1905年)袁世凯、张之洞奏请清廷立停科举,以便推广学堂,咸趋实学,从此江南贡院便结束历史使命。从江南贡院落成直至晚清废除科举为国家输送800余名状元、10万余名进士、上百万名举人,仅明清时期全国就有半数以上官员出自江南贡院,被誉为“中国古代官员的摇篮”,明清两代名人唐伯虎、郑板桥、吴敬梓、施耐庵、 翁同和、张骞、陈独秀等皆出自于此,金陵文化之昌盛可以想见。

 

在江南贡院的基础上建设的中国科举博物馆,是中国唯一反映中国科举考试制度为内容的专业性博物馆,也是中国科举制度中心、中国科举文化中心和中国科举文物收藏中心,已开放的部分场馆包括博物馆地下一层,地面上明远楼、至公堂、号舍、碑刻及南苑的魁光阁等,含11个展厅。




공원 안으로 들어갈 시간은 없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회수로 통한다고 한다.


(바이뚜에서 찾은 사진) : 강남공원과 회수가 맞닿아 있다.


[]

중국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하기 위해 각 성() 및 수도에 설치한 시험장(). 고사장 사무를 위한 관리들의 집무실과 응시자들이 답안을 작성하는 수 천개의 작은 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방형의 긴 건물에 약 2미터 정도의 폭으로 촘촘하게 칸을 질러 한 칸에 한 명씩 수용하였으며 이런 건물이 수십 채가 있어 마치 벌집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외각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 쳐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당()대에 이미 예부 남원( )이 있어서 공원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각 왕조는 공원을 독립된 시설로 설치, 운영하였다.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지방공원은 근대학교 시설로 전용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경공원, 남경공원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제가 정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공원 시설은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원 [貢院] (교육학용어사전, 1995. 6. 29., 하우동설)


贡院[gòng yuàn]

贡院,是古代乡试的考场,即开科取士的地方。贡,就是通过考试选拔人才贡献给皇帝或国家的意思。贡院最早始於唐朝。现存有江南贡院、北京贡院、定州贡院、川北道贡院等遗址,其中南京江南贡院作为中国古代最大的科举考场最为出名。







용문

강남공원 맞은편 과거박물관


中国科举博物馆  


中国科举博物馆位于南京市秦淮区夫子庙学宫东侧,地处夫子庙秦淮风光带核心区,是中国科举制度中心、中国科举文化中心和中国科举文物收藏中心。已开放的部分场馆包括博物馆地下三层,地面上明远楼、至公堂、号舍、碑刻及南苑的魁光阁等,含11个展厅,是中国唯一一家地下式博物馆。

 

中国科举博物馆由江南贡院改扩建而成,江南贡院是中国古代最大的科举考场,鼎盛期可接纳2万多名考生同时考试,其规模之大、占地之广居中国各省贡院之冠,创中国古代科举考场之最。 博物馆东至平江府路、南至贡院街、西至金陵西路、北至建康路,总占地面积约6.63万平方米。


中国科举博物馆包含博物馆主馆、江南贡院南苑以及明远楼遗址区三大区域。博物馆主体是科举文化展示、体验的集中区;江南贡院南苑是科举博物馆主体的配套区域;明远楼遗址区主要是明远楼、至公堂、历代碑刻及部分号舍。博物馆主体两侧还建设有秦淮礼物店、游客服务中心等配套设施。



(바이뚜에서 찾은 사진)


아내가 장원을 가리키고 있다.


1.장원壯元(가운데)
2.방안榜眼(오른쪽)
3.탐화探花(왼쪽)



과거박물관 (밤)


이 깃발을 주시하지 못했었다.


중국 최대지하박물관

옛부터 장원을 배출한 곳

중국고대최대?


아편밀무역을 엄히 다스렸던 임칙서林則徐와 중국 근대 실업가 장건張謇 상  謇jian 말더듬을 건

이들을 왜 여기에 세웠을까?


임칙서는 모범적인 행정관료의 전형을 보여준다.임칙서가 아편 밀무역을 엄히 다스려서 아편전쟁을 야기하고 청나라 멸망을 재촉하였다는 식의 글을 보면 좀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실지로 그는 아편전쟁후에 문책받아 서쪽 변방으로 쫓겨가기도 한다.임칙서가 소신대로 밀무역을 엄히 다스리는 일 말고 영국과 무엇을 해야한단 말인가?  그 이상이 큰 판을 읽어 냈더라면 좋았겠지만 청나라 멸망이 어찌 임칙서의 잘못이란 말인가?


임칙서 상 옆에 설명문을 읽어보면 이곳 과거박물관 앞에 임칙서를 세운 까닭이 있기도 하다.

당시에는 시간도 없고 몇 글자 해석이 곤란하여 자세히 읽지 못했었다.


임칙서(1785~1850) 자는 소목(少穆)이고 복건성 후관 사람이고,가경 진사를 했다.

강소성에 임직하던 시기에

강남공원 과거시험장의 폐정에 대하여

도광12년(1832년),도광14년(1834년)과 도광15년(1835년)에 각각

포성으로 신호를 삼는 것을 창설하고,

등불로 패를 설치하고,시험장에 입장하는 규칙 등을 명쾌하게 정하여 개혁방안을 제출하여

각 현 수험생들이 언제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출석 점검하여 먼저 포고함으로써

수험생들이 혼란스럽게 시험장 입장하는 상황을 개선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이후 강남향시에 좋은 전통으로 이어져 습관을 형성하였다.


장건張謇은 뭐라고 설명이 되어 있을까?

사실 난 이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장건(1853~1926)의 자는 季直이고,강소성 남통 사람이다,중국 근대 실업가이다.

광서11년(1885년) 6월,북경 국자감 시험에 참가하여 1등하였고,

광서20년(1894년) 회시에 응시하여 60등?으로 60명 안에?  貢士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어전 전시에 응시하여 제1갑 제1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장건은 회사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쓰는 것을 부국의 본령이라고 하였으며

책도 많이 썼는데,근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원을 성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보니 과거박물관 앞 이들이 서있는 까닭이 이해가 된다.


秦淮小喫城 옆에 있는 왕희지 상에서


王羲之 (东晋时期著名书法家)  


王羲之(303年—361年,一作321年—379年),字逸少,汉族,东晋时期著名书法家,有“书圣”之称。

琅琊临沂(今山东临沂)人,后迁会稽山阴(今浙江绍兴),晚年隐居剡县金庭。历任秘书郞、宁远将军、江州刺史,后为会稽内史,领右将军。其书法兼善隶、草、楷、行各体,精研体势,心摹手追,广采众长,备精诸体,冶于一炉,摆脱了汉魏笔风,自成一家,影响深远。风格平和自然,笔势委婉含蓄,遒美健秀。李志敏评价:“王羲之的书法既表现以老庄哲学为基础的简淡玄远,又表现以儒家的中庸之道为基础的冲和。”代表作《兰亭序》被誉为“天下第一行书”。在书法史上,他与其子王献之合称为“二王”。


왕희지 상 앞에 있는 쌍릉정雙陵亭이라는 정자에는 노인들이 한담하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노숙인들이 침구를 정돈하고 있었다.

쌍릉정이란 이름의 뜻을 이해를 못하겠다.

 

이정표



부자묘와 첨원을 구경하고 이곳 패방을 거쳐 나왔다.

지하철역이 어중한하였다.어느 곳으로 가도 거리는 비슷하였으니 성벽쪽으로 갔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