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종묘공원 앞에 갔다.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이 여러 사람 모이기에 적당한 자리라는 이유로...
종묘공원 앞에 있는 하마비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뜻.
하마비 왼쪽 저 뒷쪽에 고건축물 대문은 종묘이다.
앙부일구仰釜日晷의 대석臺石
해시계가 놓여있던 곳인데,
대석 옆 설명문에 의하면,
세종 16년에 종묘동구에 세워졌다가 전란 속에 사라지고 받짐대만 남았다가 이마저도 광무 2년 1898년 종로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땅에 묻히고
1930년 발굴되어 탑골공원에 보존되어 있다가 2015년 종묘광장을 정비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설명이 잘 되었는지도 의문이 들고....아쉬움이 크다.
아직 밤의 기운이 남아 있는 종묘 앞
종묘는 가을과 함께 고즈넉하다.
내가 사진찍으며 부산하는 통에 아침으로 다시 깨어나는 종묘 앞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보인다.
내가 서울에 발을 디딘 1986년에 세웠다.몇 번은 이곳에서 약속도 했던듯하다.
약속 시간에 넉넉하여 걸을 요량으로 무심결에 오늘 아침 다시 밟으니 감회가 새롭다.
1850(철종 1)∼1927. 독립운동가·정치가·민권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落榜)
1881년 승지였던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 ,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사망한 해인 1927년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지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재 [李商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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