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남 장성 호남오산 남문 창의비(2022.8.18 목)

무논골 2022. 8. 22. 22:01

전북 정읍 입암에서 방장산 갈재를 넘어

전남 장성 북이면 백양사역에 이르면서 창의비 이정표를 볼 수 있는데

사진 몇 장을 남긴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자초한 국난을

관직을 탐하지 않은 선비들이 창의하여 나라를 붙들고자 하였다.

아~ 고금에 이러하구나

 


아래 창의비 및 창의사 등에 관한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왜란의 흔적 임진왜란의 흔적 | 김현우 | 한국학술정보

김현우 : 일본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저서로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국회론> 등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사남북길 32 (오산창의비)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1길 70-7 

 

 

그동안 문화재로 분류되지 못했던 오산창의사가 2013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남문 창의비’와 묶여 문화재로 확대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남문 창의비’와 ‘오산창의사’가 ‘오산창의비와 창의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좌랑을 지낸

김경수(金景壽)가 김제민(金齊閔) · 기효간(奇孝諫) · 윤진(尹軫) 등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장성 남문(현재의 북일면 오산리 소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가리켜 ‘장성 남문 창의’라고 한다.

 

당시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의병 창의 및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의병들은 김경수를 맹주로 삼고,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하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대부분 전사했다.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호남지역 유림에서 1802년(순조 2)에 남문 오산창의비를 건립했다.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석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이 비석은 두 개의 제목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적힌 ‘호남 오산 남문 창의비’이고, 

다른 하나는 뒷면과 양측면의 위쪽에 가로로 새긴 ‘유명 조선 호남 오산 남문 창의비’이다. 

 

앞면에는 비 제목의 양옆에 의병단의 주요 인사들의 이름을 신분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여기에는 승려 9명, 노비 1명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비문은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지었으며, 황승원이 글씨를 썼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높이 168센티미터, 폭 63센티미터 크기의 비가 들어 있다. 

 

남문 오산창의비는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약 3킬로미터 거리에 오산창의사가 있다.

 

 

오천(鰲川) 김경수(金景壽)는 1543년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마을에서 의금부도사 김응정(金應井)과 옥천 조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7세 때부터 글공부에 힘쓴 그는 하서 김인후 밑에서 공부했으며 34세 때에 참봉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아직 학문을 충분히 닦지 못했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남문에 의병청(義兵廳)을 세워 아들 김극후, 문하생 김언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만들어 곳곳에 보냈다.

의병청의 맹주로 추대된 김경수는 의병 2만여 명과 군량미 1천여 석을 모아 여러 지방으로 보내 일본군과 싸우도록 했다. 그 후에도 일본군이 침공해오자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고 의병과 양곡을 모집했는데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어 4일 만에 의병 800여 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김경수는 아들 김극후와 김극순을 불러 놓고 자신은 이미 병들고 늙어서 전장(戰場)에 나갈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자 아들들은 허락해주신다면 먼저 싸움에 나가 대의를 위해 죽을까 한다고 말했고, 김경수는 그들에게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가라고 했다.

그의 두 아들이 진주성으로 가서 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1593년 6월 10만 명을 헤아리는 일본군의 총공세를 막아내지 못해 성은 함락되고, 그 과정에서 김극후와 김극순은 전사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김경수의 나이가 54세였지만 종제와 함께 의병을 모아 전주와 여산(지금의 익산)을 거쳐 경기도 안성까지 진격하면서 일본군 30여 명의 목을 베고, 많은 백성을 구해냈다.

조정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김경수에게 군자감정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김경수는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1621년 78세에 별세했다.

김경수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당시의 사실을 엮어 ‘남문 창의록(南門倡義錄)’을 펴내고 창의비를 세웠으며, 모현리에 오산사를 세워 그와 여러 의병들을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27일 지역의 유림이 모여 제례를 행한다.

제1차 남문 창의
1592년 7월 20일 김경수(金景壽), 기효간(奇孝諫), 윤진(尹軫) 등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었고 1개월 후인 8월 24일 김경수를 중심으로 하여 제1차 남문 창의가 일어났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고창, 무장, 영광, 순창 등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들었고, 그해 11월 24일 순창현감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이들 1,651명의 의병들은 496석의 군량미를 마련한 후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12월 19일 직산과 이듬해 1월 10일 용인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자 귀향했다.

제2차 남문 창의
고향으로 돌아온 의병들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자 김경수는 1593년 5월 29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다시 설치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양곡을 비축했다. 장성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용력이 있는 병사 40명을 선발하여 의병 300명을 훈련시키는 등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현감의 지원 속에 김경수는 의병 836명, 의곡 629석을 확보했다. 그해 6월 김경수의 아들 김극후(金克厚)와 김극순(金克純)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 836명이 진주성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순절했다.

제3차 남문 창의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경수는 1597년 8월 다시 남문에서 창의했다. 백양사 소속 승병 77명을 포함한 1천여 명의 의병으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김경수의 사촌동생이자 전직 판관인 김신남(金信男)이 이들을 이끌고 8월 25일 경기도로 진군하여 안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의병 측의 피해도 컸기에 의병군은 9월 10일에 회군했다.

 

위 창의비 및 창의사 등에 관한 출처는 본 기사의 상단에서 밝혔습니다.

 

 

창의비 옆에서

 

 

3키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지인의 시골집

주인은 가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