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 이야기

전주의 역사와 문화 특강(2013.11.29 금,완산구청)

무논골 2013. 12. 4. 23:36

전주시 홍보블러그 운영단 역량강화 특강이 있어 참석했다.

 

블러그 운영단에게 저녁을 사시기로 완산구청장님께서 하셨기에

특강장소를 완산구청 회의실로 잡았다고 한다.

 

특강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중에 있는 모습

젊음은 멋져.

그냥 서있어도 멋진 젊음~~ 대학생 블러그 홍보대사중 한 분이다.

 

전주역사박물관장님의 특강을 들으며 메모를 했다.

 

강연자인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님한테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메모를 정리해본다.

1시간이란 짧은 시간에 요점을 명확히 짚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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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는 호남의 큰 거점이 익산이었는데

나중에 전주로 옮기게 된다.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전주(全州)로 개명

936년 후백제가 망하고 937년 중국에 전주(全州)라는 지명이 생긴다.

중국지명이 먼저 생기고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주는 그렇지 않다.

후백제 유민이 중국 전주를 건설했는지 논란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듯하다.

 

<호구총수>(정조13,1789년)에 의하면 전국 740만명이고,

한양은 4만4천호,18만 9천명,

평양은 3만1천호

전주는 2만1천호,7만2천명으로 세번째로 큰 도시였다.

 

풍수적으로 전주는 북쪽이 열려있다.기운이 흩어진다는..

서쪽의 가련산(可連山)과 동쪽의 건지산이 연결되지 않아 허하기 때문에

덕진 연못을 만들었다.물은 모이는  기운을 가지고 있어 풍수적 처방을 한 것이다.

 

도시가 동서로 형성될 때는 인재가 많이 나고

남북으로 형성될 때는 인재가 나지않는다고 한다.

지금이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다.

 

견훤이 892년 무진주(광주)를 장악하고 900년에는 전주로 이동하여 후백제를 건국

후백제의 역사가 복원된다면 반역이 아님을 알게된다.

호남의 원죄는 힘이 쌔다는 것이다.

 

조선의 발상지는 전주.

일제 강점기에는 전주가 태조 본향임을 부정하였다.그 근거로 이색의 신도비에 선조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라는데...1943년에 편찬한 전주부사(全州府史)가 식민사관 관점에서 작성되고

그 인용이 1980년까지 이어졌다.1990년에 교정되었다.

전주부사는 내용이 풍부하니 인용을 하겠지만 식민사관에 의해 편찬한 것이니 그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

 

豊沛之鄕(풍패지향).태종 10년 1410년 태조 어진이 전주에 봉안되었다.

향후 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곳으로 '어진박물관'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문용 여사,마지막 황녀,를 통해 '통치자 교육의 한 모습을 본다'

 

전주성 남문을 풍남문이라 하는데

외부에서 보면 이곳은 황제의 본향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내부에서 보면 "호남제일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전라도의 수부(首府)이다.

 

경기전이 들어오면서 향교가 이전하였고,경기전 일대는 빈땅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 빈땅에 한옥마을이 형성된다.

근대에는 양반들이 도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서문은 패서문沛西門,남문은 풍남문豊南門

전주는 출판의 도시에만 머물지 말고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야.

완판본完版本

임진왜란에서 전주가 보존되지 못했다면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웅치

이치

 

지금 대접을 못받는 것은 왜 이리되었을까?

최명희 혼불에서 다음과 같이 전주를 표현한다.

8권에 '꽃심을 가진 죄였는지 모른다'

4권에는 '저항과 풍류'

 

全州四不如(전주사불여)라는 것이 있다.

官不如吏관불여이; 양반벼슬아치들은 전주 아전들만 못하고

吏不如妓이불여기; 전주 아전들은 전주 기생만 못하고

妓不如聲기불여성; 전주 기생들은 전주 소리만 못하고

聲不如食성불여식; 전주 소리는 전주 음식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