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2014-03-22 토)

무논골 2014. 3. 22. 19:47

성당 앞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1953년에 지어졌다는 성당은 최근 보수공사도 하고 조경도 다시했다고 한다.

 

집사님께서는 현관 앞을 물청소하고 계셨다...한가로운 정경이다.

 

 

성당은 언덕 위에 있고,

언덕을 올라온 나그네가 성당 본당을 향하여 난 길을 걷자하니

마치 왕릉 등에서나 볼 수 있는 신도(神道)를 연상하게 한다.

 

 

성당 본당에서 바라본 조금 전 나그네가 지나온 길이다.

주변에는 왕궁에서 보이는 회랑을 연상시킨다.

 

 

이 계단을 올라,

성당 안으로 향한다.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자산을 내어주신

예수 성심은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마음 자체이며

온 인류 구원의 중심이자 원천이시다. 

 

 

 

풀한포기에도 사연이 있을진데,

설령 사연을 몰라주면 어떠리~~

그저 존재함이 있으면 될뿐인데....


하물며,

사람의 흔적인데...

나는 어떤 인연의 끌림으로 이곳 춘천 죽림동에 있는 성당 언덕에 올라와 있는 것인가!

 

남도 땅 동학의 외침에도 

오늘은 이곳 북쪽 지방 춘천 죽림동 언덕에서도 울림이 크다.

 

아버지 두 째 째 제사를 맞이하여

춘천 큰집에 왔다가 제수 준비에 동참은 아니하고

살짝 나와서 춘천 시내를 거닐다 이곳에 왔다.

 

이곳은 춘천의 중앙,제일시장이 있는 곳이고

멀지 않은 곳에 춘천역이 있고,

미군부대가 있던 곳과 멀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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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죽림동성당 공식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복사한 것이다.

http://juklim.cccatholic.or.kr/index.php?mid=history



1. 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조선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실학(實學)의 학풍을 일으킨 남인(南人)계 선비들이 18세기 말엽에 이른바 강학회(講學會)를 연 것이 교리 탐구와 신앙 수련의 모태가 되면서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선배와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부터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였으나 멀지 않아 거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에 이은 신유대교난(1800~1801)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강원도 등의 산간 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사십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퍼져나간 신앙에 귀의한 초기 교우들 가운데는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요한과 회양 지방의 조신철 가롤로 처럼 1815년에 투옥된 분들도 계셨는데 후자는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5일 서울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셨다.  이분들보다 늦게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아홉 명이 투옥되어 그중 두 명이 옥사하기도 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1880년을 전후하여 공인되기까지 강원도 시골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힘겹게 전교에 헌신한 김 시몬 신부와 최 요한 신부도 울진과 춘천 말고개에서 각각 잡혀 두 분 모두 원주 감영에서 치명하셨다.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 된 지 80여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민(Mutel)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 르메르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2. 풍수원 성당과 곰실 공소의 성장


  당시 풍수원 본당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2천여 명의 교우를 관할하게 되었다. 르메르 신부 후계로 방인 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8년동안이나 2대 풍수원 주임으로 있으면서 교회는 강원도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풍수원의 교세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이미 1896년 원주 본당 분할을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춘천(죽림동의 전신 곰실)본당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구비(현 양덕원)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풍수원 본당은 경성(서울)대목구로부터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1955. 9. 20. 부터는  대목구, 1962. 3. 10. 부터는 교구)가 분할·설립되면서 춘천으로 편입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가 춘천 교구로부터 갈라져 나가면서 이번에는 원주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곰실(고은리)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3.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말딩이었다.


  엄주언(嚴柱彦)말딩은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 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연히「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이태 후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거기서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영세한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는 나머지 가족이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쫒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한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나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한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른다. 윗너부랭이에서 여러 해 땀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너부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춘천·화천·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된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외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 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면서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숙한다.



4. 곰실 본당의 춘천진출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거듭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이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용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와 계조직,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품품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고개 현 죽림동 성당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후 4대의 방인 사제가 1938년까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 이어 원(Larribeau)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명의상 서리로는 당시 광주 지목구장 오원 맥폴린(Owen McPolin)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구인환(Quinlan)토마스 신부가 춘천 감목대리로 임명되면서 제6대 춘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얼마 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어느 있의 도토리 밭을 사서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로부터 골롬반회가 춘천 교구를 1994년에 장익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을 사목하면서 초대 구 토마스 주교와 2대 박(Stewart)토마스 주교가 교구를 사목하였고 도합 7명의 외국인과 12명의 본방인 주임 사제를 지냈다. 이렇게 자립한 춘천 교구가 1999년 4월 25일에 60주년을 맞았다.



5. 새 성당 건립


  현재의 죽림동(竹林洞)성당은 김유용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 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구 토마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다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에 본격 착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건축 작업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와 또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참에 6·25전란이 터졌다.



6. 성당 파괴와 납북


  기막힌 전란이 터지자 춘천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뿐인가.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구 토마스 교구장이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바난 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했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방 주교를 비롯한 외극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케바난 신부도 방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분 중에는 구 토마스 신부와 조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처참한 전란 중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이른바1·4후퇴라는 참패를 당하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 만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7. 성당 복구와 완공


  이 와중에서도 1951년 8월에 제 13대 본단 주임으로 부임한 공 토마스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하였다. 복구 준비는 한참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성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전되어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살아 구 신부는 순교하신 방 주교의 뒤를 이어 한 동안(1953~1957)교황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11월 23일에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 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대축일에, 이지는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 성당의 축성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모두가 그처럼 힘을 모아 파괴된 성당을 복구하고 완공하던 저 어려운 시대로서는 최고로 잘 지은 훌륭한 죽림동 성당이었건만 4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손질할 필요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누수로 삭아가는 지붕과 천장, 몹시 녹이 슨 창틀과 꺼지는 마루, 뒤틀린 문틀, 누전 위험이 큰 배선 등, 견고한 돌 벽채를 제외하고는 가벼운 개보수를 넘어 총체적 중창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2000년 대희년과 교구설정 60주년이라는 성숙과 도약의 뜻깊은 해도 아울러 맞게 되었던 춘천 교구로써는 그 상징이자 중심인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성당의 모습을 일신히여 새 천년기에 들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일을 더욱 뜻있게 이루고자, 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94년 12월 14일 춘천 교구장으로 서품 착좌한 장 익 요한 주교는 죽림동 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를 비롯 많은 분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가에 힘입어, 1998년 4월부터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까지 다섯 달에 걸쳐, 성당의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순전히 우리 나라 사람들만의 기량과 성의와 노력으로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흡족한 성당을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8.엄주언 말딩(1872-1955)회장과 말딩회관 건립


 죽림동 본당이 창설되고 자리잡게 되기까지에는 참으로 신앙심이 돈독하고 성실과 열정을 지닌 엄주언 말딩(1872-1955)회장님의 숭고한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춘천지역에 본당이 생기기까지 공로자로서 이지역 전교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시다. 그는 생활이 곧 신앙이었던 모범적 사도로서 칭송되어야 마땅한 분이시었다.


 그는 1872년 12월 10일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심성이 착하여 동리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고, 한문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1891년 그는 자기집 건너방에 세들어 사는 채장수의 권유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는다.


 그는 "세상 부모도 공경 못하면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인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부모보다 더 높으신 대부모 천주님을 모르고 미신을 섬기며 살아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하는 깨달음의 탄식을 하면서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그는 곧 한국 천주교 발생의 요람인 광주 천진암을 방문하고 돌아와 신앙 생활을 위해 그곳으로 이사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맏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반대하던 가운데 두형이 우연이 죽게 되자 1893년 맏형과 둘이서 천진암에 가서 한달을 지냈다. 추수를 위해 집으로 돌아 온 이들은 추수를 마치고 그 해 늦가을에 가족(7인)을 모두 데리고 다시 천진암으로 떠났다.


 움막에 기거하며 어려운 생가운데 이듬해에 형과 자신이 불란서인 목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1896년에는 온 가족이 영세를 받았다. 광주생활 중 자녀가 1명 더 출생하여 모두 8명이 되었다. (엄주언은 20세에 14세인 윤씨와 결혼하였다.) 3년간의 광주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곧 전교의 사명을 띠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처음 그들은 집안이 살고 있는 서면 월송리로 갔으니 천주학쟁이라 냉대를 해 동면 장학리로 갔으나 역시 정착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외가 친천인 윤가택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부랭이 폐가를 사서 이주하게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낮선 곳에 맨주먹으로 돌아온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쌀 1가마와 콩 2가마를 빌려 떡갈나무 잎을 따 죽을 쑤어 연명하며 화전을 일구었다. (그 당시 그곳 떡갈은 엄씨 일가가 씨를 말린다는 말이 이었다.) 처음에는 배타적인 이웃으로부터 놀림과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 그는 약주 한잔 안하는 근검한 생활을 했으며 밤이면 글을 아는 사람을 모아 교리와 성서를 가르쳤다. 원래 학문의 바탕이 있는 데다 신앙생활이 몸에 밴 그를 마주 대하면서 차차 사람들은 존경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었다.


 윗 너부랭이에서 4, 5년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아래 너부랭이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땅을 늘려 재산도 모으게 되었다. 심는 것마다 잘 돼 당시 조이삭은 어른 허리를 동일 정도였다 한다. 신자가 늘어감에 따라 집과 함께 강당을 지어 공소예절을 갖춰나갔다. 풍수원 정규하 신부님을 모셔 일년에 한번씩 40-50명씩 영세를 하였다. 정신부는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마부를 통해 순방날자를 미리 알려오면 그 날자에 신자들이 홍천으로 가서 신부님을 영접하고 짐을 옮겨왔다. 일년에 몇회씩 이루어진 순방은 홍천 물구비 공소를 시작으로 춘천, 화천, 양구 순으로 이어 졌다 한다. 그 당시 장티푸스가 유행하고 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는 그 환자들 틈에서 열심히 장례일손을 도우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혼자 어깨에 메고 뒷산에 묻어주곤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전염되어 사경을 헤메다 살아나기도 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에 엄격하여 마을에서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권장하였으며 금주, 금연을 권했고 규율을 어길 때는 불량자 취체령을 발동하여 양대인(당시의 외국신부에 대한 지칭) 앞에서 벌을 받게 하고 50전의 벌금을 내게 하였으며 말 꿇임(사각 됫박 속에 무릎을 꿇게함)이라는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성서를 읽을 때나 교리를 논할 때에는 식사들을 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교우들이 증가함에 따라 1920년에는 공소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의 마을 직각(현재의 구장)인 양참봉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직접 성당짓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으며, 사제관도 짓고, 우물도 팠다. 그들은 회장을 세사람두어 제1구역인 윗 너부랭이는 양 마두 회장, 제2구역인 중간너부랭이는 양 말구 회장, 제3구역인 신촌리 일대는 최 도마 회장이 맡았다.


 초창기의 주일 참례 때는 30-40명의 교우가 모였으며 주일과 대재(단식재), 소재(금육재)를 아주 철저히 지켰다. 공소가 건립될 즈음에는 250-300명의 신자로 늘어났다.


 1920년 9월 초대 신부님을 모시기까지 그는 풍수원 본당과 서울의 명동본당을 여러차례 왕래하였으며 그러기를 수년,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신부님을 모신 후에는 신앙의 뿌리도 더욱 든든히 내려지고 교회 모습도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김유용 신부와 뜻을 같이 해 본당의 시내 진출을 도모하였다. 시내 진출의 바탕이 된 것은 애련회(사랑을 훈련시키는 회)였다. 15세 이상된 신자는 모두 이 회에 가입했으며 회원은 종신회원으로 1인당 50전씩을 거두었고, 계를 조직하여 새 성당 건축기금 마련에 노력했다. 또한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당시 한컬레당 5전)로 기금을 마련하여 애련회소유 농토를 늘리고 이에서 나온 쌀을 장리로 주기도 하여 (한 가마당 세말)기금을 늘려 나갔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몇 년 기울인 끝에 이들은 지금의 죽림동 본당 아래 골롬반 병원터에 있는 김영식의 집(당시 약사리 41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성당으로 쓰게된다. 당시의 땅값은 평당 30전으었고, 애련회의 기금외에 엄주언은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새 성당터를 사는대 보탰다.


 현재의 수녀원 사택, 아랫마당, 병원자리는 그의 땅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본당자리는 당시 도토리 밭으로 이씨라는 사람의 소유였으며 구인란 신부가 땅을 샀다한다. 이밖에도 엄주언은 현재의 동내 초등학교(고은리)부지 1000여평을 기증한 바 있으며 집에 데리고 있던 일꾼을 11명이나 영세시켜 장가들여줬다. 죽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신자수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뿌린 한 알의 밀알이 큰 결실을 거둔 것이다. 죽림동 이전 후에도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고, 몸소 실행하는 종교인으로서의 귀감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시키고, 전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일가만도 5대째 이어지면서 외손까지 합하면 80여명의 신앙가족을 이루고 있다. 천주 앞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신앙을 보여 온 엄주언은 1955년 4월 30일 83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본당에서는 춘천지역 복음의 못자리인 이곳 약사리 언덕에 엄주언(말딩) 회장을 기념하는 말딩회관을 건립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회장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말딩회관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말딩회관은 장차 교구평신도 회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으나 공사비 조달 관계로 1층은 가톨릭 신협에 임대할 것을 미리 생각했으며 2, 3층은 사무실로서 임대하기로 결정되었다. 4층은 본당 회의실로 사용하고 4층 일부와 5층은 식복사방과 손님신부방 사제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착공준비에 들어가 주교님이 지정한 "건축사무소 원 광장"에서 파견된 설계실장(채욱진)을 1996년 10월 17일에 만나서 말딩회관 건립설계에 대한 설명회가 있었다. 사실은 대우 경남 아파트 건설회사와 대지문제 해결과 사제관 성당 균열 피해 보상문제가 해결되고 주교좌 성당의 앞으로 건물 배치 구상에 따라 말딩회관 건축과 성당주변 토목 계획은 1996년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다. 새로 부임한 (96. 8. 29) 제22대 주임 이정행신부가 주도하여 건축계획이 현실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교구장님의 뜻을 받들어 말딩회관 건축설계의뢰(96. 9)와 건축비 모금 운동을 시작하여 1차 신립을 시작하였다. 말딩회관 건축설계도면은 96년 12월 완료되어 1997년 4월 15일에 삼양건설산업주식회사(대표:이진기 안드레아) 공사계약을 체결하였다. 착공하기까지 죽림동 교우들의 건축비 신립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1997년 7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8월 13일 오전 11시 30분에 "말딩회관 및 사제관 기공식"을 기관장과 주교님을 모시고 거행하였다.


 처음 계약시에는 총공사비 22억4천9백5십만원으로 계약되었으나, 설계변경 추가공사비로 3억8천만원이 추가되었다.(97. 10. 25), 또한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으나 토목 공사 5억8백5십만5천7124원이 더 추가되었으며, 설계,감리비로 1억2천8백6만1천600원이 소요된 공사이다. 이리하여 총 공사비만 3십2억6천6백6만7천314원이 든 셈이며, 추가 부대시설비만 2억 이상이 또한 소요되었다. 함께 주교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우심으로 성당 수리에 돌입하여 가톨릭미술가협회의 저명한 미술가들의 협조와 주변 본당 교우들과 죽림동 본당 교우들의 헌신적인 협조로 주교좌성당이 40여년만에 새롭게 단장되어 중창식을 갖게되므로 한국천주교회 성당 건물중에서도 전례적면이나 예술적 면에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은 주교좌 성당으로서 중창식을(98. 9. 14) 갖게 되었다. 아름답고 전례적 의미로 새롭게 성당이 태어나기까지는 장익주교님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저명한 교우 조각가 미술가들의 협조와 봉사정신으로 이루어졌다. 성당에 모셔진 성물과 조각품, 스테인글라스, 전례용 의자와 신자장궤틀 고해실 문 등등 전부 의미있고 정성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귀중품이다. 말딩회관 및 서제관건립 성당 중창식 그리고 주변 환경 정리와 주교좌 성당으로서 면모를 고루 갖추기 위해서 1997. 9 - 2000년도까지 잔디밭 가꾸기, 나무심기등에 죽림동 교우들의 땀이 베어있음을 말하고 싶고 성당주변 정리정돈과 성당 관리 말딩회관 관리는 조금이라도 소흘히 할 수 업슨 것이므로 항상 교우들에게 관리 정신과 주교좌 성당을 잘 보호 보전 하는데 긍지를 갖도록 권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관심을 갖어야 할 것이다.


 교구설립 6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제를 지내면서 1999년 4월 24일 말딩회관 및 사제관 축복식을 주교님 주례를 거행하고 60주년 감사제를 말딩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음악제, 감사미사, 전시회 등으로 25일까지 거행하였으며, 25일 60주년 감사미사는 김수환 추기경님 주례로 죽림동 성당에서 오후3시에 거행되었다. 미사후 60주년 기념 리셉션은 말딩회관 3층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