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 이야기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호서원(2014-07-04 금)

무논골 2014. 7. 4. 18:10

구호서원은 완주산업단지에서 봉동읍 방향으로 가다가 도로 왼쪽에 있다.

사진 왼쪽 귀퉁이에 구호서원이 보이고,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는 잘 모르겠지만 수봉산이나 옥녀봉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호서원의 단정한 모습과

모가 뿌리를 착 내린 튼튼한 모습이

내게는 정겹게 느껴지고 세월의 경이로움을 갖게 한다.

 

구호서원 현판

 

관리인 아주머니...

협문이 열려있으면 사진이 안좋게 나온다면서 얼른 문을 닫아주신다.

 

평소에 서원은 닫혀있다.물어물어 관리인 집에 가서 낮잠을 주무시는 아주머니를 모셔왔다.

주섬주섬 앞지락을 여미고 졸움을 쫓으려는듯 하품하면서

나를 안내하시는 모습은 그저 시골 아주머니다웠다.

 

서원 이곳저곳을 말씀하시는 동안에는 제법 유식께나 해보인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도...

 

 

 

구호사.

구호서원에서 향사하시는 곳

 

아주머니가 위폐를 열어 보이시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신다.

 

구호서원 묘정비

주변에 있는 풀은 취나물이라고 한다.어차피 잡풀이 많이 자리기에 일부러 취나물을 심었다고 한다.

제초작업에 열올리는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

 

구호서원 묘정비 뒷면

 

백산재

구호서원의 강당이다.

 

 

 

백산재 앞모습.

마루에 먼지가 많아 신발을 신은 채로 들라하신다.

]

구호사에서 담장 너모로 바라본 백산재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막 들리는듯하다.

 

 

구호서원중수기

 

구호서원 중건기

 

구호서원 중건 상량문

 

입덕문,강당인 백산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입덕문

 

입덕문 앞 은행나무.

이 서원의 역사와 같이 했을 것이다.

 

모현문,성현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성현을 배향하고 있는 구호사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근세 호남의 명필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이다.

 

모현문

 

서원 앞을 지나는 우산천.

가까이에는 만경강이 나란히 흐르고 있다.

 

우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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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완주군공식블러그에서 복사해온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구호서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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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는 전라북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완주군에는 조선시대 역사를 담고 있는 여러 문화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완주군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서원은 조선시대 역사적 인물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한 완주군의 문화재 서원. 오늘은 완주군이 간직하고 있는 작지만 알찬 문화재 ‘서원’을 소개해드립니다.

 

 


조선개국원종공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구호서원

 

 

구호서원은 서기 1730년(영조 6년)에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곳에는 친원파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한 박상충과 조선 개국원종공신 이성중,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운 박은, 송유저, 박소, 임사수 등의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777년(정조 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98년 유림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이들의 위패를 다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후 1868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다시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워 백산단(柏山壇)이라 명명했습니다.

 

 

1904년(고종 광무 8년)에는 이름을 구호단(龜湖壇)으로 바꾸고 박종설, 임치우, 유기섭 등 세 사람을 더 모셔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1970년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구호서원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수많은 권력암투가 벌어졌는데 그 역사적 배경 인물들의 위패가 모인 구호서원을 찾아 역사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ㆍ향사인물 : 박상충, 이성중, 박은, 송유저, 임사수, 박소, 박종설, 임치우, 유기섭
ㆍ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 510

 

 


비운의 후계자 '태조'의 넷째 아들 위패가 모셔져 있는 봉강서원

 

 

봉강서원은 1754년(영조 30년) 용진면 모란동에 임금으로부터 모란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세워졌던 것을 1852년(철종 3년) 지금의 위치에 건물을 옮겨 이름을 봉강으로 고쳤습니다.그 뒤 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1869년 헐어졌다가 1899년 사액(賜額)서원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서원에는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충간(忠簡)공양헌 이헌구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제사는 2월과 8월 두 차례에 나누어 지내오고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강당은 민가의 모습이다. 회양대군(이방간)은 본래 정종에게 적사가 없어 자기가 후계자가 될 줄 알았으나 개국정사에 공이 컸던 동생 정안대군(이방원)에 밀려 목숨까지 위협받다가 끝내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조선시대 동생에게 밀린 비운의 후계자의 이야기를 찾아 봉강서원에 찾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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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향사인물 : 이방간, 이헌구
ㆍ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조선조 명재상 ‘황희’(黃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용진서원

 

 

용진서원은 1680년(숙종 6년)에 창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68년(고종 5년)에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22년 구억리 원구억 마을 입구에 복원했습니다. 경내에는 외문과 내문, 사당, 강당 등이 있는데,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입니다. 한쪽에 열녀각이 세워져 있으나 비석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용진서원에는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정승이 모셔져 있습니다. 황희는 고려가 망하게 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였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간청으로 벼슬길로 나왔습니다. 두문동에서 나온 그는 1394년(태조 3년) 성균관 학관 겸 세자우정자의 벼슬을 겸임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영의정에 올랐으며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원만한 인품과 청렴한 생활로 후세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세종의 묘정에도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임금으로부터 익성이라는 호가 주어졌다. 역사 속 인물을 책으로만 접하는 게 아니라 직접 위패를 모신 장소에 자녀들과 함께 온다면 아이들의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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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향사인물 : 황희, 황수신, 김맹, 이익, 강이온, 박금
ㆍ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568

 

 


작은 문화재 ‘서원’에서 발견한 역사여행길

 

 

완주군의 서원은 하나의 작은 역사책입니다. 역사가 있는 곳에는 사건이 있고, 사건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겨납니다. 서원에 모셔진 위패를 따라 가다보면 조선시대 역사를 살포시 들춰보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모르고 지나쳤던 문화재.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씩 챙겨 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