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 이야기

전주시 삼천동 목은 이색 선생 영당 및 충신 이흥발 정려(2015-03-11)

무논골 2015. 3. 14. 08:29

 

목은 이색 영당 앞 홍살문

멀리 보이는 묘는 목은 이색 선생의 것이 아니고 조선 중기 충신 이흥발의 묘이다.

(멀리보이는 묘는 휘 흥발의 6대조이신 휘 윤부 지묘입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玉光天 님께서 2017.12.24 수정요청하는 댓글을 달으셨으나 애초 원문을 유지하고

  요청 사항을 도드라지게 표현합니다.아래에도 연동하여 수정하여야 할 것이나 생략합니다.

 

 

 목은 선생 영당,화상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목은 선생 영당을 담넘어로 봤다.

봉심하고 싶은 사람은 연락하라며 문앞에는 핸드폰 번호가 여럿 안내되고 있으나

가는 길이 공무인지라 화상을 친견할 수는 없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인조 1년 1626년에 그 사신을 목벨 것을 주장하였고 호란이 있어 모든 관직을 버렸다고 한다.영조 29년(1753년)에 정려를 지었다는 데 외국에 대하여 강경한 것이 국가위란할 때 관직을 버리는 것이 충신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어렵다.자료가 너무 없어.

이흥발의 선조인 목은 이색은 고려가 어려운 시기에 원나라 유학도 하고 여러 관직도 맡은 걸로 되어 있다.

 

이흥발의 묘와 정려 앞쪽에 있는 문중 재실

봄이지만 간밤에 내린 눈이 담장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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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 자료

 

이색(李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해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____지금의 서천)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인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程朱學)을 배웠다. 이제현백이정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이제현의 문하생 중에 수제자로 이름났던 그는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원나라에서 입수한 송나라정호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정도전,

 

1352년(공민왕 1)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장원(1등)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가 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金九容)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후 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1371년(공민왕 20년)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년(공민왕 22) 한산군(韓山君)에 피봉되었다가, 다시 1377년(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 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고, 그 후 오사충(吳思忠)의 참소로 장단(長湍)을 거쳐 함안(咸安)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되어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使)로 임명되었다. 귀양지 장단에서 선왕(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중 애제자(愛弟子)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시고권지35에 전한다.

그는 역성혁명파의 역성 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정도전은 그와 우현보, 정몽주에게 격렬한 논조로 비판을 가한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연좌되었으나 정도전은 그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다시 금천·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 해인 1396년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신륵사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후에 서애(西厓) 유성룡삼국(魏)의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後漢) 조의 양표(楊彪)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고 있다. 문하에 유창, 권근,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으며, 고려 말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