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북 고창 도림리 왕림마을(2017-07-01 토)

무논골 2017. 7. 1. 13:48

정읍 입암면에서 지방도를 타고 고창으로 가는 중에 왼쪽에서 만나게 되는 마을

가까운 산능선 어디 쯤엔가를 까막재라고 한다.큰까막재 작은 까막재....

그리고 구름에 가려 안보이지만 방장산도 저 방향에 있을 것이다.



왕림마을 


 사람의 손길로 일부러 쌓아놓은 돌탑과 길


돌탑

지리산에도 저와 비슷한 분위기의 돌탑이 있었지...



그 돌탑을 돌아서 앉아 있는 기** 처사의 집


마당 앞에도 돌탑이 있다.

돌탑 옆에는 높은 깃발 게양대가 있다.

게양대 끝 모양은 삼지창이다.




 

벽면마다 싯구인지 주문인지 걸려 있다.


해석이 맞는지 모르겠지만...내 식대로 해석해본다.


신선이나 부처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본래 하늘이다.

사람이 본래 그 하늘의 신선이고 부처의 사람이다.

이기 심성이 조화하여 행하면

하늘 가운데 사람 가운데 변화하는 신이다. 


 

 

 

뒷마당 장독대도 정갈하다.


갱정유도 강대성 성인의 부적


아침나절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이러저런 말씀을 나누다가 문득 영신당주의 모습을 알려주신다.


아~~


갱정유도인들은 

조선시대 의관을 하고

새벽마다 노자 도덕경을 외운다고 그냥 건성으로 들었었는데...


순교라고 할만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고

원 미소용 화 남북민 

신앙에 기초하여 이런 급진적인 의사표현을 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아봤네...


<인터넷 자료>


1. 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 실린 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신흥 종교 창시자.

   본관은 진주. 수은공(睡隱公) 강항(姜沆)의 후손이다.


   ‘유도갱정’이라는 유도 계통의 신흥 종교를 창시한 강대성은 오낙중에게 받은 『음부경(陰符經)』을 읽으며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그는 아들, 부인과 함께 회문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러나 얼마 후 부인이 죽자 

강대성은 남원, 구례 등지를 배회하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남원과 순창 일대에서 그를 신인(神人)으로 따르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자, 그는 1943년 순창 회문산 세자봉 및 

도영동에 도단(道壇)을 개설하고 ‘유불선동서학합일유도경정교화일심교’라는 긴 이름의 종교를 창도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앞으로 세상을 이끌 구세주로 보고 이 땅에 새 왕국을 세울 강천자(姜天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뒤 8·15해방을 맞이하여 교단은 일약 대 교단으로 발전했다. 1951년 교단 본부를 김제군 광활면으로 옮겼을 

때는 전국에 수만의 신도가 있었다. 이때 강대성은 UN총회에 메시지 형식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일심교만이 말세의 창생을 제도할 수 있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니 UN은 각성하라”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비화되어 강대성은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주도립병원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강대성이 죽자 일심교는 교통 전승과 교권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종파로 나뉘었다. 현재 일심교는 남원시 도통동에 본부를 두고 있는 남원파와 지리산 청학동, 회문산, 변산 일대와 전라북도 순천에 본부를 두고 있는 몇 개의 교파가 있다.


남원파에서는 1960년경 남북 통일을 하기 위해 많은 신도들이 판문점으로 가서 북한측과 담판을 하겠다고 상경하다가 경찰의 제지로 서울역 광장에서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1996년 문화공보부에 공식 등록했으며, 현재는 포교보다 내수도(內修道)에 치중하고 있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글


    전라북도 순창 출생. 농부인 강덕진(姜德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혼인하여 농사에 

종사하였다.


    빈한한 농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세기말 변혁의 기운과 전근대적 농촌사회의 운명적인 침체상을 경험한 그는 

종교체험을 통한 득도의 경지를 꿈꾸었다.


처음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은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진삼동이며, 그 곳에서 수도를 시작한 이유는 산내면 진삼동에 수도할만한 빈집을 찾았고 집 주인의 허락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이름을 기동(基東)이라 했다. 그 뒤 다시 순창군 쌍치면으로 돌아와 오낙중(吳洛中)으로부터 

『음부경(陰符經)』을 빌려보면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39세 때, 순창군에 있는 회문산(回文山)금강암(金剛庵)에서 처자와 함께 기거하면서, 득도를 위한 고행과 정진에 

전념하였다.


1929년 마침내 천지를 뒤엎는 듯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종국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일관되게 기록한 자료는 없으나 그의 종교수련과 관련하여 인격형성의 과정을 미루어보면, 정서적 기질이 남달리 특출한 것 같다.


그는 처, 그리고 아들인 강용학(姜龍鶴) 등과 동거하면서 이른바 누건수(漏巾水) 교리를 터득했는데, 교리의 내용은 세 사람이 만민의 죄를 속죄하여 흘린 눈물을 받아서 서로 나누어 마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성취했다고 하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죽은 처의 시체와 동거하면서 본인, 죽은 처, 아들의 삼부부자(三夫婦子)가 영혼을 엇바꾸는 생사교역(生死交易)을 성취했다고 한다.


여광여취(如狂如醉)의 상태에서 신천지의 도래를 선언하고, 병을 치료하는 등의 일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일제 당국의 간섭과 주변 사람들의 적대시하는 환경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은 펼칠 수가 없었다.


갱정유도 교리의 근간인 소박한 구제론과 종말관은 이른바 ‘누건수’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8·15광복 후 본격적인 교단의 창설과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1954년 이른바 중흥국(中興國)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구호의 여파로 인하여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파씨가 여물고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했다.

삼대의 의지 



오치재

까막재에 있는 장흥 고씨 제각이다.


고창군 비지정 문화재

 


 

 정*희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