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담론

소설가 손홍규 산문 『다정한 편견』을 읽고(2018.8.12 일 ~ 14 화)

무논골 2018. 8. 14. 22:21

책 표지

 

소설가 약력

 

k신문 칼럼

 

산문집 한 단락

 

 

소설가 손홍규 산문 『다정한 편견』을 읽고

 

 

소설가 손홍규는 내 중학교 후배이다.지난 달까지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7년 후배이다.

손홍규 군을 만나게 된 사연을 먼저 밝히고 나서 손 군의 산문을 읽은 느낌 몇 자를 적어 내 독서 이력 한 줄 채워봐야겠다.

 

그런대로 괜찮은 경향신문을 읽곤 한다.며칠 전 우연히 맘에 드는 글이 있었다.제목이 역설적인듯하였다.「가슴 속 폐허」라? 신변잡기 소소한 글감으로 글이 전개되다가 갈무리는 가슴 속 폐허가 아니라 뭔가 가슴 속 가볍지 않은 울림이 있었다.

 

 부룩이니 개망초마른 세수등 사전을 찾지 않고도 문맥으로 봐서 대충 문해는 가능하였

지만 정확한 뜻을 알아야 이 격조 있는 글쓴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예의를 차리고 나서 글쓴이가 바람결에 이름만 듣던 내 중학교 후배라는 것을 기억해냈다.이런 이쁜 글을 쓴 손 군을 만나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다.같은 성과 비슷한 항렬자를 쓰는 듯한 선배한테도 연락하고 후배들한테도 연락하고….드디어 J방송사 기자가 동창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연락처 수배를 부탁하였다.

 

며칠 후 약속하였다.~ 손 군이로구나.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나보다 좀 미남이지만 차림이

별로 세련되어 보이지도 않고 그냥 내 거울을 보는듯했다.잡어 매운탕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늘 집안에서 글만 쓰는 소설가가 모처럼 출타하여 내가 근무하는 소도시까지 왔던 것이다.

 

손 군이 선물한 책은 『다정한 편견』이며, 2008 11월부터 2012 5월까지 경향신문에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칼럼을 묶어 2015년에 냈던 책이다.

 

순식간에 읽어낼 매력이 넘치는 글이다.개인적인 지칭은 손 군이지만, 글이 사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면 분명 소설가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는 이 시대 참다운 선비이고 스승이다.그리고 체험과 주장이 비슷한 내 나이 어린 동무이다.

 

아래는 읽으면서 책에 밑줄 그은 것을 옮긴 것이다.내 기억에 도움이 되고 독서 흔적이나마 남기려 할뿐이니 너무 깊게 생각은 마시라.

 

1.     생동감 있는 글감들

 

박용길 장로

사는 꼴이 우라질이지요

우산이 없는 녀석들만이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이며 비그이를 했다.

왜 이 순간 어머니를 보며 싱긋 웃어주지 않았나를 자책하는 때가 오리라는 걸

자박자박 들려와야 비로소 아침이 시작되었다.

풍경은 사람을 밀어내지 않았다.

사람을 소거한 풍경이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듯 사람이 전면을 차지한 풍경 역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두 눈을 지그시 가고 가르릉대던 녀석이야말로 내가 부러워해 마지않는 팔자 그대로

모든 존재는 공포를 느낀다,

이제는 누군가 나를 불러주길 간절히 기다린다.

노동에 지친 부모님의 앓는 듯한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살면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환대를

잔칫날처럼 그들먹해지는데 함께 어울려 근처를 구경하러

그이들은 어둠 속에서 공평해지며

맛있겠다는 말이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최고의 헌사인 셈이다.

수매가를 점치는 들뜬 목소리들이 한데 뒤엉켰다가 푸르고 높은 하늘로 사리사리 풀려갔다.

그 설망물맛을 잊지 못한다.

아름다운 것이야말로 맛있다.그저 설탕을 물에 탔을 뿐인데도

일가붙이가 턱없이 소슬한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지청구를 먹기 마련이다.

싸목싸목.지금은 이 낱말을 천천히라는 뜻으로 풀어 새기지만

한 생을 두고 우리가 자신의 길을 싸목싸목 가듯이 밥 한 공기 싸목싸목 뜨고

고집스럽게 손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심사가 정녕 궁금해진다.

요란한 매미 소리와 외양간에서 울리는 요령 소리마저 입맛을 돋웠다.

부엌의 풍로에 양은 냄비를 올려놓고 물이 끊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해서 아버지는 냄비째 들고 여물통에 다가가 물을 따랐다.

우리 식구가 고대에서 온 무리라도 되듯 새롭게

어둠은 모든 걸 공평무사하게 취급하는 힘이 있었다.

넛할아버지를 기다렸다.할머니의 오라비이자 아버지의 외숙부인 그이는 길을 따라

오라비 오셨소.누이 잘 지냈는가.그 말을 나누기 위해 곶감 지고 산을 넘은 사람들이 그립다.

생긴 것 여축없이 시골머슴인데

선잠 들었다가 깨어난 어머니의 등짝을 아버지가 툭툭 두드리는 소리를.

사개가 맞지 않아 덜컹대는 화장실 문소리 사이로

무넘깃둑 위로 물이 넘쳐흘러 좀더 하류 쪽의 제대로 된 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마음에도 창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기억할 수 없는 유년 시절의 나날들

남의 일이라는 말이 서운함보다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언제부턴가 전자우편과 손전화로

편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거의 유일한 문학이므로

무르춤해진 내게 낯선 주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대기에 이내가 끼고 대지에 땅거미와 산그리메가 밀려들 무렵이라든지 멀쩡하던 하늘을 순식간에 메지구름이 뒤덮으며 사위가 잿빛으로 변하는 순간처럼

빨랫방망이로 치덕치덕 두드리는 소리,찰방찰방 물에 헹구는 소리가 좋았고 누군가를 헐뜯는 흠구덕조차 그곳에서는 사납게 들리지 않았다.

고무함지를 머리에 이고

타락의 속도를 늦출 용기를 지녀서 인간다워지는 존재이니까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그이들이 가르쳐주었다.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들 저 아름다운 것들이 사람 말고 다른 무엇으로 환생할 수 있으랴

한참을 걸터듬어본 뒤에야 어떤 사연이

어떤 사물이든 추억이 깃든 사물에서는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디스토피아

몰강스러운 말까지 다양한 지청구를 듣는다.

몰두하면 사랑하게 된다.

영혼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내 영혼은 무사한가

그러나 그대 때가 되면 눈물을 그쳐야 한다.

기운이 빠져 무릎이 푹푹 꺾였다.

아랫목 이불 품에 앙궈둔 밥 한 그릇

딱히 사이가 버성긴 집안이어서가 아니라

시간이란 순간의 지속이라는 견해보다 서로 무관한 매 순간들의 집합일 뿐이라는 견해에 마음이 기운다.

소를 식구처럼 여겨 생구라 불렀던 이들의

가끔은 말이 소멸하지 않고 거처할 곳을 찾는 것도 같다.그곳은 주로 사람의 가슴이다.

음향이 사라진 곳에 감정이 남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은 이제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봄이 오는 소리는 사람의 발소리 닮았다.

족대나 얼맹이를 하나씩 쥐고

맑은 시냇물에서 자란 물것들을 깡통 가득 담을 수 있었다.

텃밭에서 상추솎아내듯 건져내면 그만이었다.

자연과 세계를 이웃에 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황홀한 일이었는지

열서너 살 무렵 이후 나는 여전히 여행중이다.

허방을 짚듯 간신히 걸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존엄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삶은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것이기에

넉가래를 쥐고~~ 넉가래 손잡이 쪽 마구리에 턱을 댄 채 서로

어두운 밤길을 걷다 구름을 헤치고 유유히 빠져나온 달을 만난 적이 있다.

소나무 우듬지의 전지작업을

내가 고비늙은 듯한 기분이 드 정도였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치욕과 증오와 공포라는 동반자를 만난다.

창조적 오독 : 문둥이도 꼬집히면 아프다 문둥이도 꽃이 피면 아프다

소문으로 아는 고전은 나의 것이 아니다.

레일의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덜컹이는 전철 바퀴의 진동을

내게 저물녘 태양은 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인 것만 같았다.

끄느름한 기운을 뿜어내며

선거날 지키듯이 지 할애비 제삿날도 지키면 좋겠구만

아름답고 올바른 편견이 절실한 시절이다.해서 나는 편견을 사랑한다.

 

2.     손홍규 선생의 문학론

 

나는 상업주의에 굴복한 작가들의 손에서 소설을 되찿아오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난다.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도적적인 문장이란 도덕을 옹호하는 글을 뜻하지 않는다.

철저한 관찰과 이해를 뜻한다.

그녀라는 낱말을 쓰지 않겠다는 거였다.

소설이 별건 아니지만 소설가에게 소설은 삶이다.삶을 쓰는데 소설가가 완벽히 글 뒤로 숨을 수는 없다,

독서는 읽는 행위가 아니라 교감하는 행위이다.

모국어를 갈고 다듬는 일이야말로 문학을 업으로 삼아 사는 이들의 목숨과도 같은 일이라는 깨달음이 누추하지 않은 건 그이의 아름다운 시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당신들이 바느질을 하는 동안 당신들의 사연을 실과 바늘 삼아 시를 쓰고 소설을 썼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발싸심을 하며 취재를 다녀야 했는지를 털어놓았다.

짓다.집 밥 옷 복 글

내가 지은 글 한 줄은 집과 밥과 옷 그리고 복에 견줄 수 있는가를 늘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문학도 일종의 각인이다.

끝없이 다른 이의 심장으로 옮겨 적는 것이다.

실제 풍자는 정련된 고도의 학습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문학적 기법 가운데 하나다.

모순어법은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의미론적으로 어긋나는 단어 결합을 뜻하는데

 

3.     손홍규 선생의 현실참여 입장

 

우리는 곧잘,우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를 통치자로 뽑지 않았던가.

천박한 자들이 지배하는 시대를 몇 해씩이나 잘 견뎌오지 않았던가.

삶을 각다분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비인간적 조건들을 나는 증오한다.

오늘날의 도적질이란 공자가 살던 시대보다 은밀하다.

그 사소한 차이가 정권의 성격을 규정짓는 게 아니라 정권의 차이가 그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에까지 변화를 불러온 것임을 잘 안다.

만석보를 무너뜨리는 거였다.역사는 되풀이 된다.

나는 언제 한번이라도 인쇄노동자의 고통에 창작의 고통을 견준 적이 있었던가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겁쟁이다.

우리에게 전쟁 위협이란 매회 종영방송이 미뤄지는 연속극처럼 지루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4.     책에서 언급한 작가 작품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말했듯

정현종 시인의 섬

윤홍길의 소설 장마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

이광수의 무정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엘리엇의 황무지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서유기

천일야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백운거사 이규보

채만식 남정현

노엄 촘스키 역사적 공작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