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제14차 중국여행 2/15일차 사천성 미산시 삼소사(2019.4.5 금)

무논골 2019. 5. 1. 20:43

오늘부터 중국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성도에서 남쪽에 있는 미산시에 소동파 고향 삼소사에 들렀다가

소동파도 종종 들렀다는 낙산시,옛이름으로는 嘉州가주의 낙산대불을 보는 것이 주요 일정이다.


호텔에서 잠시 눈을 붙인듯한데 벌써 새벽 5시.

몸만 겨우 씻고 성도 신남문 버스터미널로 택시로 갔다.15원

약 4~5km

南河남하를 건넜을 것이다.

그래야 터미널이 나오니까


미산시로 가는 버스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터미널 앞 노점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다.


버스출발시간은 7시 20분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일찍 서두른 덕분에 터미널에서 여유롭게 정비할 수 있었다.


훈뚠 10원어치로 둘이서 아침을 해결하였다.

중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있고,뜨겁기도 하고

첫 여행이라 들뜬 마음으로 맘껏 먹지는 못했다.


성도 신남문 터미널에서

미산시까지는 대략 80km이다.

9시 12분에 미산시 톨게이트에 들어왔다.


성도시내를 벗어나지는 않은듯한데

石羊客運站을 지난다.

쌍류공항 근처인듯하다.

어쩌면 이 근처에서 숙박하는 것이 더 편리했을지도 모른다.



성도 시내를 벗어나고 점점 푸르름이 나타난다.

대숲과 그 옆 무덤이 잡힌다.
그리고 물 댄 논이 펼쳐진다.


지역의 무덤은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위 사진으로는 분간이 안되겠지만...

롤케익 빵을 반원 짤라서 엎어 놓은 모습에 비석을 바싹 붙인 모습이다.

콘크리트로....


정겨운 농가주택이다.


사천성을 서부라 치면

하남 하북 호남 호북 등 동부에는 거의가 이층집이었는데

이곳은 단층집이다.


화무인간도시농업주제공원花舞人間都市農業主題公園이라는 이정표가 특이하다.


초보운전 딱지가 재미있다.


신수상로 청다관조 新手上路 請多關照

(처음 길에 나섰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중국심화농촌개혁심화구

彭山 현대농업시범기지


무논 사이로 유채밭이 즐비하다.

꽃이 피는지 지는지 모르겠다.


밀감밭도 한참동안 이어진다.


팽조산풍경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새 도로를 닦는지

차가 밀리는 구간이 있다.


9시 12분경 미산 톨게이트 근처에서 만난 미주성


미주성을 새로 단장하고 있는듯하다.


미산터미널 도착은 9시 30분.

주요 교통시설이 밀집되어 있는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미산터미널에서 삼소사까지 시내버스가 연결되지만

시간을 아끼려 택시를 탔다.10원


삼소사에 가까울수록 가로수가 크고 깊다.

오래된 도시 느낌이다.


이번 여행의 첫 방문지인데

사실 우왕좌왕 견학했던듯하다.


좀 계통없이 봤었고...

갑자기 착오에 의해 시간 안배를 잘못하여 서둘러 견학을 마무리하고

고속철이 운행하는 미산동역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늘 느끼듯이 미지의 곳을 여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 좋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삼소사


삼소사 앞 골목에는 패방이 있었다.


가로로 고사곡행古紗穀行...아마 紗穀行은 지명인듯

세로로 좌우에 각각 숭인崇仁과 상의尙義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배가 고파 동파凍粑 8개 8원에 요기하고 삼소사 안으로 들어갔다.


* 粑구운 음식 파. [bā], 남방어  팍(phag). 보릿가루나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경단


삼소사 앞에서 동파 선생을 그려본다.

팔방미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영달하지 못한 소동파 선생


삼소사는 미산시 서쪽  사곡행紗穀行에 있으며,북송시대 유명한 문학가인 소순 소식 소철 삼부자의 고거이다.

원대에 사당이 되었고 명말에 병화에 훼손되었다가 청나라 강희 4년 1665년에 중건하였다가

점차로 확장하고 수리하였으며 현재는 백여 묘에 이르며,촉땅에서 가장 이름난 사당이며 고전 원림이다.

역대로 명사 문인 묵객이 배알고 삼소를 추모하고 제사하는 문화의 성지이다.



왼쪽 위 서대문으로 들어와서 오른쪽 아래 남문으로 나와

맞은편 삼소기념관에 들렀다.


소씨의 저택이란 뜻


우리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원림을 먼저 구경하였다.


나중에 사당에 가서 참배하고

정문으로 나가 맞은편에 있는 기념관에 들렀다.


이곳은 애초 소동파의 집터였다.


원림을 여유롭게 봐야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 근처 기이한 돌을 천석연天石硯이라 부르는듯하다.






드디어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의 사당인 삼소사에 와서 참배한다.


 

나는 동파 선생을 참배하고 내 모습을 남긴다.


동반자


아버지 소순 상 ?


동파의 동생 문정공 소철 상


급히 보느라 사실은 소상의 각각 이름을 정확히 보지못하였다.

소씨 삼부자 중 가장 유명한 동파 소식 상을 촬영하지 못한듯하다.


허나 그게 역사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가 허상이었으며 그나마 재해로 다시 만들었으니  말이다.


양기養氣...소씨의 학은 양기를 으뜸으로 삼아~~


남송 효종이 찬문한 것을 서기 2000년에 각자한 비석.

소식을 문충공文忠公 태사太師로 추증한다는 내용



송 효종이 문충공 소식 문집에 찬문한 것을 2000년에 비석으로 새긴 것이다.

남송 건도乾道 9년 1173년 윤 정월에 찬했다고 한다.



서대문으로 들어가 원림을 구경하고

삼소사 사당을 참배하고 정문으로 나오니 맞은편에 삼소 기념관이 있다.

자료가 풍부하였지만 겨우 사진 몇 장 남긴다.



삼소공원 옛 사진



민국시절 삼소공원으로 개칭한 내역과

신중국 성립이후 유지보수한 내역을 안내하고 있다.



삼소사 옛 패방인듯


지진은 무정하다.2013년 지진이 핥퀴다.


다시 단장하다.


2013년 4월 20일에 아안시 노산현에 7급 지진이 발생하여 80km 떨어진 이곳 삼소사에도 피해가 있었는데

복원하여 새롭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어쩐지 원림은 어느새 자연스런 맛이 있었으나

건축물엔 콘크리트의 어색함이 있었다.


동파의 아버지 소순을 예우하고 있는 모습이다.


1057년 재상 한기韓琦가 관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구양수 범진 등 대신들이 참석하였다.

소순은 포의로 참여하니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한다.


동파東坡 매화梅花 제양호提梁壺


탕건림湯建林 탕윤택이 설계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라고 설명글이 있다.

탕건립은 1965년생으로 의흥시 정촉진에서 도예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간단히 설명할 것이 아니라 원문을 남겨두고 싶었다.

일견 잘 쓴 문장이다.


동파와 관련한 성어들이다.

기념관 사진은 가독성이 떨어지니

바이뚜 지식검색 찾은 것을 아래에 남겨 놓는다.


글쓴이 武府小道, 知道合伙人教育行家 2018-02-24  


1 、설니홍조 雪泥鸿爪

      苏轼在任凤翔府判官时,写下了《和子由渑池怀旧》:“人生到处知何似?应似飞鸿踏雪泥。泥上偶然留指爪,

      鸿飞哪复计东西?……”“雪泥鸿爪”就被概括为众所周知的成语了。
2 、야유대상 夜雨对床

      唐代韦应物有“宁知风雪夜,复此对床眠”,苏轼读后感触良深,与苏辙约定“夜雨对床”,但一直未实现。

     “夜雨对床”便流传下来,本不单指兄弟之间,经此也成了兄弟之事。
3 、하동사후 河东狮吼

      苏东坡在一首诗里,开朋友陈季常的玩笑说:“龙丘居士亦可怜,谈空说有夜不眠,忽闻河东狮子吼,

      拄杖落地心茫然。”因为这首诗,在文言里用“河东狮吼”就表示惧内,而陈季常是怕老婆的丈夫,

      因此这个名字也就千古流传了
4 、不合时宜 朝云乃苏轼侍妾,一次苏轼吃完饭,扪着肚皮问家人:“内装何物?”有的说是文学才华,

      有的说是满腹学问,唯朝云说是一肚皮不合时宜,苏轼遂引为知己。
5 、흉유성죽 胸有成竹

      文同,字与可,是北宋画墨竹的名家,也是大诗人苏轼的至友,二人交情颇深。苏轼也喜欢画墨竹,曾向文同求教。

      文同在指点苏轼画竹时说:“画竹必先得成竹在胸,执笔熟视,乃见其所欲画者,急起从之,振笔直遂,以追其所见,

      如兔起鹘落,少纵则逝矣。”苏轼对此说深以为然。宋人晁补之也有诗云:“与可画竹时,胸中有成竹。

      ”这就是“成竹在胸”或“胸有成竹”这一成语的出处。此后,人们常用这个成语比喻在做事之前已有通盘的成熟考虑。
6 、출인두지 出人头地

      北宋嘉佑二年(公元 1057 年),苏轼在全国选拔进士的会考中,以《刑赏忠厚之至论》的论文获得了欧阳修等

      主考官的高度赞赏。欧阳修见卷子独占鳌头,便想评为第一,点为状元,又怕卷子是自己的得意门生曾巩所作,

      评为第一,点为状元,有瓜田李下之嫌,就判为第二名。等开了卷,才知是苏轼的试卷,很是后悔。

      在礼部举行的口试复试中,苏轼以《春秋对义》获得第一名。后来欧阳修在读苏东坡的感谢信时对老友梅尧臣说:

      “捧读苏轼的信,我全身喜极汗流,快活快活!此人是当今奇才,我应当回避,放他出人头地。请大家记住我的话,

      三十年后没有人会再说起我来的!”当时欧阳修名满天下,天下士子进退之权全操在欧阳修一人之手,

      欧阳修这一句话,苏轼之名顷刻传遍全国,“出人头地”这一成语就是从这里来的。后以“出人头地”比喻超出一般人,

      高人一筹。
7 、취지부진取之不尽,용지불갈用之不竭

      苏轼在《前赤壁赋》中有“且夫天地之间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虽一毫而莫取。唯江上之清风,与山间之明月,

      耳得之而为声,目遇之而成色,取之无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无尽藏也,而吾与子之所共适。”后来,

      有人把“无禁”改为“不尽”。
8 、수락석출水落石出

      苏轼《后赤壁赋》“于是携酒与鱼,复游于赤壁之下。江流有声,断岸千尺,山高月小,水落石出。

      “水落石出”便由此演化而出。한국의 서울 북쪽에 있는 수락산도 같은 글자를 쓴다.
9 、명월황화 明日黄花

      “明日黄花”出自苏轼在重阳节所写的一首诗和一首词。他在《九日 ( 按即重阳 ) 次韵王巩》诗中写道:

      “相逢不用忙归去,明日黄花蝶也愁。”又在《南乡子.重九涵辉楼呈徐君猷》词中写道:“万事到头都是梦,休休,

       明日黄花蝶也愁。”后人从这个名句引申一步,以“明日黄花”比喻种种过时的人或事物。
10 、견인불발坚忍不拔

       苏轼在《晁错论》中说:“古之立大事者,不惟有超世之才,亦必有坚忍不拔之志。”“坚忍不拔”这个成语由此得出。
11 、해옥주첨海屋筹添

       苏轼《东坡志林 • 三老语》:“尝有三老人相遇,或问之年……一人曰:‘海水变桑田时,吾辄下一筹,

       尔 ( 迩 ) 来吾筹已满十间屋。’”原谓长寿,后以“海屋筹添”为祝寿之词。
12 、방류옥대芳留玉带

       苏轼曾在金山留玉带镇山,佛印回赠裙衲,成为千古佳话。
13 、금조참종琴操参宗

       苏轼在杭州时,携琴操游西湖。一日戏曰:“我作长老,尔试参禅。”琴操问:“何谓湖中景?”苏轼答曰:

       “落霞与孤鹜齐飞,秋水共长天一色。”琴操曰:“何谓景中人?”答曰:“裙拖六幅潇湘水,髻挽巫山一段云。”

       “何谓人中意?”“随他杨学士,鳖杀鲍参军。”“如此究竟如何?”“门前冷落车马稀,老大嫁作商人妇。”琴操大悟,

        即日削发为尼。




팽산이니 미주니 여러 옛 지명이 표시된 산수화가 있어 사진으로 남겨본다.


"연리 여지"


중국인들의 심미안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래에 설명글 전체를 실어본다.

문장도 좋은듯하고...


제목으로   并蒂 [Bīngdì] 丹荔[dānlì]

 并蒂는 꼭지를 같이 한다는 뜻이고 비슷한 의미로 한국어로는 연리지가 있으니  "연리 여지"로 하면 적당할까?


소식의 서론書論 중에서 한 구절



고속철을 탈 수 있는 미산동역

장거리버스터미널과 시내버스터미널도 이 근처에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삼소사 구경하고 오후 1시 18분 기차를 타고 낙산시로 가면되는데 홀연 착각에 의해

삼소사 구경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택시타고 이곳에 왔다.13원


한국에서 예매한 인터넷 기차표를 이곳에서 현지 승차권으로 교환하고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광장에서 빈둥거리다 문득 바이뚜 지도 검색을 해보니 인근에 역사명승지가 있다.


원경루遠景樓


택시를 탔다.남는 시간에 갑자기 끼어든 여행지라서 관리를 잘못하면 시간에 어긋날 수도 있다.

택시 탔다.11:49~56   9원


역사적으로 유명한 누각 이름 원경루를 차용하여 지은 빌딩?

중국인들은 이 정도로는 꺼리낌이 없는듯하다.

  歷史上,遠景樓曾兩度被毁。遠景樓最早是北宋眉州知州黎希聲在元豐年間主持修建的,元豐元年(公元1078年)始建,曆時6年,於元豐七年(公元1084年)竣工。創建之初,黎希聲還特邀在外宦游的蘇東坡爲家鄉這座名樓作《眉州遠景樓記》。從此,遠景樓便聞名遐邇,據說可與嶽陽樓、黄鶴樓、滕王閣齊名媲美,是“中國四大名樓”之一。

역사상,북송 때 처음 세워진 원경루는 소동파가 지은 《미주원경루기眉州遠景樓記》가 유명해져 중국 4대 명루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에서 3대니 4대니 하는 것엔 그다지 구속을 받지 않고 그냥 즐기는 편이다.


據載,黎希聲爲人剛正,仁慈清明,深受眉州百姓的愛戴和擁護。正是這位黎知州十分重視城市建設,在他的主持下,眉山修建了聲名遠播的遠景樓。黎希聲修建的遠景樓高度隻有30米,是當時眉山城内最高的建築,典型的唐宋建築風格,大氣、精美,堪稱巴山蜀水一大勝景,曆代文人常在此吟詩作畫、交友唱酬,老百姓也常常領着親朋好友和家人上樓游玩。


經過宋、元,到明末,眉州遠景樓逐漸衰敗,並被損毁於兵火之中。到了清代乾隆年間,時任知州的蔡宗建又修複了遠景樓,且有詩爲證:署名遠景樓,樓成人不返。人無百歲身,景且千年過。可惜不過沒過多久,這座名樓再次被毁。

송 원을 거쳐 명말에 이르러 원경루는 쇠락하였고 병화에 훼손되었다가 청나라 건륭연간에 재건하기도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現在的遠景樓,是2004年采用宋代建築風格建成的,主樓共13層,高80米,裙樓也有5層,這是目前全國最高大的仿古建築群之一。현재의 원경루는 2004년에 송나라 건축풍으로 건축하였는데 모무 13층,높이는 80m이다.


新的遠景樓位於眉山市東城湖廣場南側,二環路與湖濱路交叉路口以東的綠化帶上,總建築面積30000多平方米,觀賞性與實用性並重。主樓兩側是仿古裙樓,名曰“超然閣”和“醉月閣”,主、副建築渾然融合,視野開闊,組成了一幅融水、天、樓爲一體的宏圖壯景。


憑欄遠眺,遠景樓巍巍屹立,樓上青瓦、白檐、褐柱渾然天成,堂皇霸氣,兩旁裙樓典雅婉約,光彩迷人,整個建築莊重古樸,舒展大方,散發出東坡文化的魅力。游人可登高望遠,欣賞東坡湖全景,領略岷江河風光,盡享“登臨覽觀之樂,山川風物之美”意境。


遠景樓最有特色的,是其獨具魅力的夜景。每當夜幕降臨,華燈初放,沉浸在夜色蒼茫中的遠景樓,蘊含着幾分神祕而旖旎的色彩。抬頭仰望,整個塔樓彩燈齊亮,燈火爛漫。五彩繽紛的燈光置景裝飾,使主副塔樓鱗次櫛比,錯落有致,層次涇渭分明,總體景觀宜人。擧目遠眺,重建的遠景樓,宛若一座巨大的天然水晶宮,晶瑩剔透,海市蜃樓。隻見遠景樓的夜色像一首優美和諧的抒情詩,更加烘托出獨一無二詩書城的人文景觀,與一汪碧水粼粼的波光,滿天閃爍的星鬥交相輝映,風采奪目照人,其景奇麗醉人,恰似“人間天堂”,金碧輝煌,在春意融融中一片歡聲笑語,到處游人如織,車水馬龍,熱鬧非凡,使人樂在其中,流連忘返。


소동파가 지은

미주 원경루기는 아래와 같다.

眉州遠景樓記


吾州之俗,有近古者三。其士大夫貴經術而重氏族,其民尊吏而畏法,其農夫合耦以相助。

蓋有三代、漢、唐之遺風,而他郡之所莫及也。


始朝廷以聲律取士,而天聖以前,學者猶襲五代之弊,獨吾州之士,通經學古,以西漢文詞為宗師。

方是時,四方指以為迂闊。至於郡縣胥史,皆挾經載筆,應對進退,有足觀者。

而大家顯人,以門族相上,推次甲乙,皆有定品,謂之江鄉。非此族也,雖貴且富,不通婚姻。

其民事太守縣令,如古君臣,既去,輒畫像事之,而其賢者,則記錄其行事以為口實,至四五十年不忘。

富商小民,常儲善物而別異之,以待官吏之求。家藏律令,往往通念而不以為非,雖薄刑小罪,終身有不敢犯者。

歲二月,農事始作。四月初吉,穀稚而草壯,耘者畢出。數十百人為曹,立表下漏,鳴鼓以致眾。

擇其徒為眾所畏信者二人,一人掌鼓,一人掌漏,進退作止,惟二人之聽。鼓之而不至,至而不力,皆有罰。

量田計功,終事而會之,田多而丁少,則出錢以償眾。七月既望,谷艾而草衰,則僕鼓決漏,取罰金與償眾之錢,

買羊豕酒醴,以祀田祖,作樂飲食,醉飽而去,歲以為常。

其風俗蓋如此。故其民皆聰明才智,務本而力作,易治而難服。守令始至,視其言語動作,輒了其為人。

其明且能者,不復以事試,終日寂然。苟不以其道,則陳義秉法以譏切之,故不知者以為難治。
今太守黎侯希聲,軾先君子之友人也。簡而文,剛而仁,明而不苟,眾以為易事。既滿將代,不忍其去,

相率而留之,上不奪其請。既留三年,民益信,遂以無事。因守居之北墉而增築之,作遠景樓,日與賓客僚吏遊處其上。

軾方為徐州,吾州之人以書相往來,未嘗不道黎侯之善,而求文以為記 。 
嗟夫,軾之去鄉久矣。所謂遠景樓者,雖想見其處,而不能道其詳矣。然州人之所以樂斯樓之成而欲記焉者,

豈非上有易事之長,而下有易治之俗也哉!孔子曰:“吾猶及史之闕文也。有馬者借人乘之。今亡矣夫。

”是二者,於道未有大損益也,然且錄之。今吾州近古之俗,獨能累世而不遷,蓋耆老昔人豈弟之澤,

而賢守令撫循教誨不倦之力也,可不錄乎!若夫登臨覽觀之樂,山川風物之美,軾將歸老於故丘,

布衣幅巾,従邦君於其上,酒酣樂作,援筆而賦之,以頌黎侯之遺愛,尚未晚也。

元豐七年四月十五日記。



동성호가 내려다 보인다.


옛스런 풍으로 고루를 짓고

호수 너머로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다.


호수가 원경루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여유럽게 마작하고 있다.


여유로운 풍경은 눈으로만 담을수밖에 없다.

원경루에 올라서 더 멀리 보고 싶었지만

호텔방이기 때문에 관망대는 없다는 말만 들었다.내가 표현을 잘못하고 잘못 알아들은걸까?


원경루에서는 동성호와 민강岷江 사이에 있는 "동파성시 습지공원"을 멋지게 볼 수 있을텐데...

민강은 참 친숙하다.  이따 남쪽으로 가서 보게 될 낙산대불에서도 민강을 볼 것이다.

이번 여행의 막바지에 성도 북쪽에 있는 도강언에서도 민강을 볼 것이다.


* 민강岷江 : 쑹판현[松藩縣], 원촨 현[汶川縣] 부근을 지나 관 현[灌縣] 부근에서 골짜기를 빠져나온 뒤에 내강과 외강으로 나뉘었다가 강 출구에서 다시 합쳐진다. 러산[樂山]에서 다두 강[大渡河]을 받아들이며, 이빈[宜賓]에서 양쯔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전체길이는 793㎞이고 유역면적은 13만 3,500㎢이다.


원경루 안에는 호텔과 음식점이다.

해산물 부페를 먹고자 하였지만 기차 시간에 늦을까봐 포기하였다.

허기는 피하고자 군걸질꺼리만 샀다. 麻花 15원


고풍과 현대풍이 조화로운 아름다운 도시를 마음에만 담고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낙산으로 가는 기차를 놓치면 안되니까 좀 걷다가 급한 마음에 또 택시를 탔다.


동파 선생의 선禪과 詩를 詞를 음미할 줄로 기대하고 불원천리 왔건만

시간이 쫓기는듯 시간을 허비한듯한 미산시 여행을 마치고

낙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근데 어째 기차 하나 제대로 못타고......

우리 객차로 이동하려는데 엔진칸이 막혀서 그저 삼 사십 분을 입석으로 갔다.

열차가 너무 길고......

열차 타는 것에 너무 방심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여행의 시작에 있다.


13시 17분 미산역을 출발하여

오래지 않아 13시 51분 낙산역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