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지슬"을 보고(2013.5.16)

무논골 2013. 5. 16. 23:44

 

퇴근을 서두르지 않고 이거저거 들춰보다가

문득 아리랑시네마센터에서 무슨 영화를 할까 궁금해졌다.

 

8시 5분에 "지슬"

몇 달 전에 보고 싶었다가 잊고 있던 영화,

급! 퇴근,

돈암역에서 어묵 두 개로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영화관으로 향했다.

 

오일육과 오일팔이 있는 오월은

내겐 절망과 희망이 함께 있는 달이다.

 

이 영화를 통해

절망을 보았고 희망을 보았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바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얼마전에 카카오톡으로 퍼졌던 '엘지유플러스 고객센터 직원과 할머니의 대화'와

비슷한 동문서답식의 대사가 영화 내내 제주어로 질펀하다.

 

한국어의 일종인 그 제주어를 못알아듣기 때문에

영화는 거의 모든 대사에 한글로 표준어 대사를 제공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도 그렇고,

토벌군인들도 그렇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 자체이고 惡 자체인데,

토벌 군인 내에서도 당연히 존재하는 서열이 만들어내는

살풍경이 관객에게 마음을 짓누른다.

 

산으로 피한 마을 사람들도

그들의 소소한 대화에는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듯하지만,

나는 답답하고 비열함을 더 많이 느꼈다.

 

다행인 것은

영화 속 풍경은 그 자체로도 볼 만 하다.

 

 

위 사진 두 장은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것이다

 

지슬 : 땅의 열매 '지슬'은 제주도 말로 '감자'를 뜻한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사건> : 인터넷에서 인용함

 

제주 4·3 1948 4 3일부터 1954 9 21일까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막아내려 했던 제주 민중들의 항쟁과 이에 대한 미군정 당시의 군인과 경찰들,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말한다. 제주 4.3의 시발점이 된 1948 3 1일부터 사실상 7 7개월간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약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사살당했다. 마을이 통째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1948
3.1절 발포사건
1948
3 1,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반 주민이었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했고 민심수습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섬 사람들을 ‘폭도’로 몰았다. 이 사건이 4.3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
4.3 무장봉기
1948
4 3일 새벽 2,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1948 3 1일 경찰 발포사건 이후 1954 9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7 7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미군정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1948
11.17 계엄령 선포
11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
출처 : 제주4.3 평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