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15분
육조 혜능께서 체도하신 광효사 구경하고
골목골목길을 더듬어 육용사로 가고 있다.
7시 32분
육용사 앞에 다다랐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대하돈 大蝦豚 15원 대하와 돼지고기라는 뜻인데 대하는 있는데 돼지고기는 못본듯하다.
운탄면 雲呑麵 16원 구름을 삼키는듯한 국수라는 뜻인데 사진 위가 운탄면이다.
아침 식사로 참 적당히 맛있고 담백하다.
7시 51분
식사를 마치고 육용사 들어가기 전에 맞은 편에 있는 "장군부"라는 편액을 본다.
장군부
저 장군부 안에는 지금은 "광동영빈관"이라는 호텔이 운영되고 있다.
예전에는 왕부 또는 장군부였다.
将军府
장군부 역사
广州有两条看上去很普通的道路,名字却很“威水”,叫将军东路和将军西路。从清朝的地图上可以看出,这里过去是广州将军衙门遗址的一部分,所以取名为“将军衔” 。
清代广州将军衙门范围很大。
它坐北朝南,大门位于今天的中山六路,后墙位于今天的迎宾路。
东起解放北路,西至六榕路,包括今天的将军东、西路和广东迎宾馆 。
这将军府有不同寻常的来历。
明代中期的地图上,这里是提督府行署。
清顺治七年(1650年)平南王尚可喜和靖南王耿继茂率领清兵攻入广州后,大兴土木,在这一块地方营建王府 。
靖南王移师福建后,原靖王府便被平南王之子尚之孝占有。
康熙二十年(1681年),清政府平定了“三藩之乱”之后,决定在广州驻防八旗兵,并设置驻粤八旗将军统领。
从此,昔日的靖南王府便被改名为将军衙门(又称广州将军府)
장군부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광동영빈관
广东迎宾馆(广州)1952年开业,1998年重新装修,主楼高8层,附楼高4层,拥有客房284间套,标准间面积约30平方米。
周围有人民公园,西门口站,市政府,越秀区政府,广州大厦,省教育学院,金融大厦,广州交易广场,东风中路,中山六路,
广东迎宾馆位于广州市解放北路,与历史名胜六榕寺隔路相邻,这里昔日是王府,今日是现代化宾馆。环境幽雅,庭台楼阁,绿树成荫,
素有“闹市中绿洲”之美称。
동향東向인 육용사 산문
일반적으로 큼직큼직한 중국의 건축 포국과는 달리 주 출입문인데 쪽문인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소동파를 기리는 주련이 있어 약간의 위용을 보충하는듯하다.
一塔有碑留博士일탑유비유전사 ; 탑에는 비문이 새겨있어 박사를 남기고
六榕無樹記東坡육용무수기동파 ; 육용사에는 나무가 없지만 동파는 기억하고 있다.
애초 육용사는 光孝、華林、海幢寺사와 더불어 광주 불교 4대 총림이라는데
실제 와보니 화탑을 제외하고는 포국도 좀 낯설고~~~
육용사라는 절 이름은 송나라 소동파가 남해에 귀양가 있다가 풀려나 북상하면서
이 절에 머물렀는데 주지의 청에 의해 "육용六榕"이라는 제자를 써주면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公元1100年(北宋元符三年),大文豪苏东坡由海南贬所北归,路经广州到该寺游玩时,应寺僧道琮之请为寺题字,他见寺内六株榕树绿荫如盖,盘根错节,气势不凡,即欣然书下“六榕”二字。
육용사 천왕
산문이자 천왕문이다.
1. 육용사 개괄
六榕寺位于广州市的六榕路,是广州市一座历史悠久、海内外闻名的古刹。
寺中宝塔巍峨,树木葱茂,文物荟萃,历史上留下不少名人的足迹。
六榕寺因苏东坡当年为寺庙题字而得名。
它与光孝、华林、海幢寺并称广州佛教四大丛林。
六榕寺和寺中的花塔一样,历来为人们所称颂,加之历史地位与光孝寺齐名
素有“光孝以树传,
净慧以塔显”之称。 * 净慧 : 六榕寺의 별칭
六榕寺以"六榕花塔"为特色标志,曾是禅宗道场,与海幢寺、光孝寺、华林寺、大佛寺并称为广州佛教五大丛林,
1983年被国务院确定为汉族地区佛教全国重点寺院,
1997年被评为广州市十大旅游景点。
2. 육용사 연보 ; 처참히 부셔졌다가 복원되고...절의 포국이 낯선 이유가 있다.
사람 하는 짓의 부질없음이여~~
公元420一479年(南朝宋代)建寺,名为“广州宝庄严寺”。
公元537年(梁大同三年),沙门昙裕法师从扶南(柬埔寨)请得佛陀舍利回广州,得到梁武帝诏许后,于宝庄严寺大殿前修建舍利塔。
此佛塔为一座四角形的六层木塔,下瘗佛舍利,木塔内外绘画着佛典图解,称“敕赐宝庄严寺舍利塔”。
公元650年(唐永徽元年),历经一百余年的风雨侵蚀,寺塔梁柱已出现破损。某日,舍利塔祥光涌现,震惊羊城百姓,信众蜂拥来观。
时广、韶都督李燧,邀集朝散大夫广州太守史某、明威将军行番禺知府折冲都尉李公等,专门到寺拜竭宝轮和尚,共商募修舍利塔事宜。经过精心组织施工,舍利塔修葺一新,再现巍峨雄姿。
公元675年(唐高宗上元二年)春,王勃离开家乡绛州龙门(今山西河津),南赴交趾(今越南)探父(其父王福畴任交趾令已多年),于十一月到达广州。适逢宝庄严寺开设法会,因受寺僧托请,写下三千余字碑记《广州宝庄严寺舍利塔碑》。
公元917年,南海王刘龚称帝,国号大越,定都广州,次年改国号汉(史称南汉),年号乾亨,升广州为兴王府。
南汉历代君主虔信佛教,宝庄严寺易名长寿寺,作为刘氏宗室女修道之所,塔仍称舍利塔,每于上元、中秋佳节登塔燃烛悬灯(号曰“赛月灯”)以兆丰年。
公元971年(宋开宝四年),南汉灭亡,长寿寺及舍利塔均毁于大火,从此湮没一百多年。
公元988(北宋端拱元年)重修该寺,并以曹溪六祖真身为原型铸铜像供奉,寺于端拱二年重修竣工,遂改名为“净慧寺”。当时寺内有古榕六棵,民间已有“六榕寺”之称,但当时只是“俗称而已、非寺名也”。
公元1086年(宋元佑元年),净慧寺住持德超和尚发心募资重建舍利塔。与前任凤翔郡宝鸡县主簿官、南海人林修居士、本郡信士王衢等,共商重修舍利塔一事。
他们依碑记“方井圆泉、参差倒景”的记载和民间所传“环列古井九”之说,寻得旧塔基址重建宝塔,当时发掘出梁代建塔所藏的佛舍利,仍旧瘗藏。
绍圣四年(公元1097年)六月三日,宝塔落成,寺僧又邀请常到寺礼佛的宋皇叔、康州(今广东德庆)刺史赵叔盎撰书《重修广州净慧寺塔记》。新塔改用砖木结,八角形,外观九层,内有暗层,实为十七层,各层内外墙壁设置佛龛供奉贤劫千佛像,故称“千佛塔”。
公元1100年(北宋元符三年),大文豪苏东坡由海南贬所北归,路经广州到该寺游玩时,应寺僧道琮之请为寺题字,他见寺内六株榕树绿荫如盖,盘根错节,气势不凡,即欣然书下“六榕”二字。
公元1358年(元至正十八年),重修舍利塔,并铸9.14米高的千佛铜柱, 柱身刻有1023尊佛像及祥云天宫宝塔图,连同塔顶的火焰宝珠、三层九霄宝盘、九层宝轮、一层双龙宝盘、八根铁链组成重达5吨的塔刹。
公元1373年(明洪武六年),寺院一半面积被辟为永丰仓,自此之后山门便改为向东,而寺院面积也日渐缩小,而六株古榕,也因寺院被割而处于寺外(原来的净慧寺规模相当宏大,占地甚广,山门朝南,“横直绵亘实逾二里”)。
公元1375年(明洪武八年),寺僧愈坚和尚等重修于元末明初期间被损塔殿,并在塔东辟建觉皇殿(此后六百年都以此殿为大殿,但该殿于“文革”时期被毁)。
公元1395年(洪武二十八年)净慧寺一度归并于西禅寺,六祖铜像也于其后被迁往西禅寺[*]。
公元1411年(明永乐九年),净慧寺重修,寺僧将苏东坡遗墨“六榕”二字,刻造一木匾悬挂于寺门之上,自此,净慧寺又称六榕寺,舍利塔称六榕塔。此后经明正统、嘉靖、万历、天启及清乾隆年间均有重修(六榕塔自清初重修之后,该塔“檐壁榱题,红绿白黄,互相辉映,旭升日落,观美如花”故又称为“花塔”)。
公元1856年(清咸丰六年),受台风侵袭,塔顶坠于地。
公元1874年(同治十三年),清皇室从海防经费中拨出巨款大加修缮。
公元1875年(清光绪元年),继咸同年间修建殿宇之后,重修千佛塔并已竣工,并撰《重修六榕寺佛塔记》。
公元1900年(光绪二十六年),清廷诏封六榕寺住持铁禅为广东僧纲司。
公元1912年(民国元年),国民政府废除僧官制度成立广东省佛教会(会址六榕寺),铁禅被推为会长。同年5月,孙中山先生辞去临时大总统职位回到广州,铁禅组织广东佛教界人士在六榕寺举行隆重的欢迎大会,支持国民革命,孙中山先生题书“自由平等博爱”贻赠六榕寺。
公元1913年(民国二年),铁禅和尚率四众弟子迎回侨龛西禅寺达数百年之久的六祖惠能铜像,并修建六祖堂以供奉。
又补植榕树四株(六株古榕时存二株:一在东坡精舍后、福泉新街后侧;一在寺东旧平南王府。)、建补榕亭、筑东坡精舍、树立“曹溪法乳”牌坊,收归散置在外的太湖奇石“朵云”等。
公元1915年(民国四年),广州地震,塔内壁与千佛铜柱之间被震裂。(1915-1935年,广州一共录得7次地震,其中比较剧烈的是1915年与1918年发生的两次。)
1921年(民国十年),市政府在六榕寺东开辟花塔街(今六榕路),又割寺东建造净慧公园,寺院面积再度缩小。
1931年重修花塔,在内部用钢筋水泥以加固。
1935年(民国24年)4月,举行花塔重修落成典礼,梁致广居士撰《重修六榕寺花塔记》。
1938年(民国27年)10月,日本侵略军侵占广州,铁禅避难于番禺、佛山等地。
1939年(民国28年)6月,日伪政权派人强行将铁禅接回六榕寺,并委以伪政权之佛协会长。
1946年(民国35年),抗战结束后,铁禅欲告老还乡,致函延请乳源云门寺住持虚云接管六榕寺。其后,铁禅因汉奸罪被判处有期徒刑8年。
同年秋季,为纪念抗日胜利一周年,举行超荐抗日阵亡将士法会。八月中旬,虚云与弟子宽鉴等来到广州接管六榕寺,并向国民政府呈文保释铁禅。
国民政府最高法院湘粤分庭改判为4年徒刑,9月27日,铁禅病死于狱中(1939年,日伪政权派人强行将铁禅接回六榕寺,并委以伪政权之佛协会长,使其最终蒙冤而逝,为世人所不解)。
1946年(民国35年)9月17日,虚云奉玄奘顶骨舍利,于六榕寺设七天七夜的水陆道场法会,以超荐抗日阵亡将士。时蓬六榕寺北堂桃树开花,胡毅生(胡汉民之弟)写下《绯桃瑞应记》一文。
1948年,宽鉴盗取六榕所有重要财产和文物逃往香港,其中有寺内四件珍贵文物:
(1)辽代紫铜精铸的药师佛像;
(2)玄奘法师顶骨;
(3)淡归诗卷;
(4)汉玉等,称为“净慧寺镇山四宝”。虚云和尚发觉后马上追还,并免去宽鉴方丈职务,由明观法师继任住持职务,解放前夕明观法师去香港。
1966年“文革”时,六榕寺除六祖铜像外,全部佛像被毁,寺院也全被占作仓库。
1979年3月,中共广州市委批准六榕寺恢复为宗教活动场所。
1983年,在塔之西重建大雄宝殿,供奉清康熙二年(公元1663年)以黄铜精铸的三尊大佛像。……
3. 육용사 修建과 훼손 과정
南朝始创之大殿位于今仓前街以北数十米处。
梁朝昙裕法师在大殿前(南)赠筑舍利塔。
唐初重修宝庄严寺舍利塔时,“光合玉庑、栋宇绵邈”。
寺院规模由此可见。
宋、元以至明初,净慧寺“横直绵亘实逾二里”,其时寺址:东面包括广东迎宾馆之地和将军东、将军西、六榕路,北面拥有仓前街、稻谷仓、石马槽,西至福泉街、福泉二巷、三巷、净慧街,南达中山六路。
明洪武六年(1373年),净慧寺院大半改为永丰谷仓,洪武八年,住持僧愈坚和尚于塔东改建觉皇殿,自此,山门东向,一塔两殿的基本格局维持到清初。
乾隆五年(1740年),寺僧“广购近地”、建造禅堂、斋堂、僧寮、客舍、仓厨、园圃,是谓“中兴”。
鸦片战争后,寺院东部原平南王府之部分旧址被占为英国领事馆(今广东迎宾馆南)。
民国十年(1921年),市政府拆城筑路,在六榕寺东部先后辟建花塔街(今六榕路)和净慧公园(今广东迎宾馆),以致山门再往后退与天王殿相连,寺院范围再次缩小,而今占地面积不足八千平方米。
塔、殿、堂、楼、阁、廊、舍等建筑总面积4350平方米。
此外,东北距寺院三公里处之白云山柯子岭,尚有一片面积为4315平方米的祖师墓塔碑,1996年辟建为墓园。
宋代广州净慧寺山门在今中山六路,明初割寺之半为永丰仓,山门亦在被割之列,洪武八年(1375年)在千佛东重建觉皇殿,改后山门东向。
民国十年(1921年)起,广州市政府拆城筑路,在六榕寺东辟花塔街(今六榕路),明初所设山门又退缩与天王殿相连。花塔是一座四角形的六层木塔。
4. 육용사 건축 배치가 처음에는 남향이었다.지금 육용사는 명나라 때 기준으로 팔방八房 중에 북당에 해당한다.
그만큼 포국이 이상하다는 말이겠지......
南朝始创建的大雄宝殿坐北朝南,塔在殿前。
此殿保存到明初,洪武六年(1373年)割寺之半为永丰仓时被割去。
洪武八年住持僧愈坚建觉皇殿(在今塔东),六榕寺即以此殿为大殿,正中门额挂着长形木刻匾“觉皇宝殿”,明清年间数次重修,清光绪三十年(1904年),获皇帝赏赐匾额“清修忠悃”,悬在殿梁上。
明初净慧寺仅存千佛塔与观音殿,昔日殿址在今之说法堂。
重建的观音殿1988年2月10日竣工,新殿坐落在六祖殿前榕荫园之东,建筑面积220平方米,高11米,以清代风格为基调,并糅合南方殿宇特色。
藏经阁在寺内解行精舍旧址东面。
明代中叶净慧寺分为八房,此处是北堂所在地。
5. 건축특색建筑特色
六榕寺塔高57米,八角九级,里面十七层,沿梯级登至塔顶,可俯瞰全市景色。塔的外形华丽壮观,檐角都悬挂吊钟,整个塔好像是花朵叠成的一根花柱,塔顶好似长在最高一朵花上的花蕊心。
这是“花塔”的第二重涵义。塔顶有元至正十八年(1358)铸造的千佛大铜柱,连上面的九霄盘、宝珠及下垂的铁练总重达5000公斤。
花塔东为山门、弥勒殿和天王殿、韦驮殿,还有苏东坡画像和有"六榕"的石刻等古碑10余方。塔西为大雄宝殿,高14米,占地面积300平方米。内供奉清康熙二年(1663年)以黄铜精铸的三尊大佛像。佛各高6米,重10吨,仪态慈祥,它是广东省现存最大的古代铜像。大殿南侧现重建了说法堂,榕荫园内有六祖堂、观音殿、僧舍斋堂、功德堂、藏经阁等。
6. 주요 볼거리
(1) 육용화탑 六榕花塔
过了天王殿,便是一个庭园。庭园正中,是一个色彩艳丽、蔚为壮观的花塔。花塔是六榕寺院中的舍利塔,是寺中最令人瞩目的建筑。因此塔一层层的塔角飞檐,宛如吐苞向天开放的枣红色花瓣,塔刹又酷似花蕊,整座宝塔犹如一支直插蓝天的巨大花柱;再加上塔身红白相间,色彩斑斓,所以人们又习惯地称其为花塔。
花塔的平面呈八角形,外观9层,内设暗层8层,共17层。它是一座仿楼阁式的穿壁绕平座结构的砖木塔,塔高57.6米,是岭南地区现存最高的宋代古塔。塔刹为元至正十八年(1358年)铸。铜质刹柱身上有1023尊浮雕小佛,还有彩云缭绕的天宫宝塔图。千佛铜铸连同顶上的火焰宝珠、双龙宝珠、九霄盘、覆盘以及八根铁链等各种构件,重是超过5吨。
值得一提的是,花塔的根基很有特色。由于古时花塔濒临珠江(旧时珠江宽达2公里),地下水位较高,为了保护塔基,花塔的建造者们先沿着塔基,像打井一样用坚固的花岗岩石砌筑9个水井并相互连环依托,形成一塔尖个九井环基,然后在上面建造高塔。北宋和解放后重修时都发现了这个九井环基。经科学测量,花塔塔身虽然倾斜了1.7米,塔基仍然比较稳固。
(2)우의불당友谊佛堂
大雄宝殿的左侧是友谊佛堂,这里供奉着1985年由泰国教育部赠送的释迦牟尼铜像一尊,该佛像高2.6米,重1吨。
(3)관음당观音堂
大雄宝殿的右前侧是观音堂。观音堂供奉的观音铜像高3米,重达5吨。这尊观音铜像与大雄宝殿的三尊大佛像都铸于清康熙二年(1663年)。六榕寺花塔塔基是用花岗岩石砌筑的九井环基,比较稳固。然而,花塔毕竟经历了近千年的风雨洗礼,虽经多次维修,但塔身仍出现了越来越多的裂缝,并倾斜1.7米而成了一座斜塔。为此,广州市政府有关部门拨款400多万元,采用了“中华791化学浆”、碳素纤维布等材料,从2001年2月开始对花塔进行了加“箍”加固维修,并于同年8月底通过验收。
동쪽에서 산문에 들면
화탑이 있고 화탑 뒤에 대웅보전이 있다.
천왕문 지나오면 바로 정원이 있고
정원 앞에 높다란 육용사 화탑이 바로 나타난다.
팔각형,외관 9층이나 실제로는 17층이며,
높이 57.6m
송나라 풍이다.
花塔的平面呈八角形,外观9层,内设暗层8层,共17层。它是一座仿楼阁式的穿壁绕平座结构的砖木塔,
塔高57.6米,是岭南地区现存最高的宋代古塔。
광주 육용사 화탑이 유명하다 하여
그저 그 앞에 한번 서봤으나
이른 아침 별 감흥없이 걸음을 재촉한다.
过了天王殿,便是一个庭园。庭园正中,是一个色彩艳丽、蔚为壮观的花塔。花塔是六榕寺院中的舍利塔,是寺中最令人瞩目的建筑。因此塔一层层的塔角飞檐,宛如吐苞向天开放的枣红色花瓣,塔刹又酷似花蕊,整座宝塔犹如一支直插蓝天的巨大花柱;再加上塔身红白相间,色彩斑斓,所以人们又习惯地称其为花塔。
花塔的平面呈八角形,外观9层,内设暗层8层,共17层。它是一座仿楼阁式的穿壁绕平座结构的砖木塔,塔高57.6米,是岭南地区现存最高的宋代古塔。塔刹为元至正十八年(1358年)铸。铜质刹柱身上有1023尊浮雕小佛,还有彩云缭绕的天宫宝塔图。千佛铜铸连同顶上的火焰宝珠、双龙宝珠、九霄盘、覆盘以及八根铁链等各种构件,重是超过5吨。
值得一提的是,花塔的根基很有特色。由于古时花塔濒临珠江(旧时珠江宽达2公里),地下水位较高,为了保护塔基,花塔的建造者们先沿着塔基,像打井一样用坚固的花岗岩石砌筑9个水井并相互连环依托,形成一塔尖个九井环基,然后在上面建造高塔。
北宋和解放后重修时都发现了这个九井环基。经科学测量,花塔塔身虽然倾斜了1.7米,塔基仍然比较稳固。
육용사의 감흥은 그저 북송 때 소동파가 제자했다는
"육용"이라는 필적값만 있을 뿐
왼통 문물이 새로 지어져있다.
화탑 설계도
내가 육용사 화탑값을 너무 박하게 칠 수만은 없다.
당대에 만든 복원품이지만 당대인의 기술과 자금과 정성이 또 동원된
가벼운 작품은 아닐 것이다.
역사성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하면서도
건축의 용이함과 향후 관리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을 것이다.
화탑 바로 뒤에 있는 대웅보전
만덕장엄
처음 이 절의 이름이 '광주보장엄사'였으니
절 이름의 흔적을 현판에 남긴듯하다.
公元420一479年(南朝宋代)建寺,名为“广州宝庄严寺”。
公元537年(梁大同三年),沙门昙裕法师从扶南(柬埔寨)请得佛陀舍利回广州,得到梁武帝诏许后,于宝庄严寺大殿前修建舍利塔。
此佛塔为一座四角形的六层木塔,下瘗佛舍利,木塔内外绘画着佛典图解,称“敕赐宝庄严寺舍利塔”。
관음전
鳥語花香會心即道 조어화향회심즉도 ; 새소리 꽃 향기가 마음에 모인 즉 도요,
行雲塔影觸目皆禪 행운탑영촉목개선 ; 흘러가는 구름과 탑 그림자가 눈에 닿으면 모두 선이라.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낙원이어라~
8시 19분, 육용사 구경을 마쳤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만난 광주시청
이 일대가 광주의 옛 도심으로 중요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아침이 활기차다.
누가 추천했던 쇼핑센터 천하성백화天河城百貨가 근처 10분 거리에 있다.
그러나 공항으로 가야하는 길이라 마음이 급해 쇼핑센터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좀 남아서 느릿느릿 지하철역으로 걷고 있다.
시청 앞에 펼쳐진 인민공원
공원에는 제법 수목이 울창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으로 모여 시간을 즐기고 있다.
태극권하는 사람도 있고
광장무하는 사람도 있다.
공원 정자에는 여중낙낙이라 적혀있다.
여중낙낙與衆樂樂,여럿이 즐긴다.
맹자에 나오는 여민동락與民同樂也과 같은 말일 것이다.
인민공원에 앉아 급한 마음을 숨기고
이번 15차 중국여행 광동성 여행에 대한 소회를 갈무리 하고 있다.
지하철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 마트에 들렀다.
이거저거 과자랑 볼펜이랑 몽땅 쓰러담았다.
130.4원이다.한국돈 22,100원
09:15 마트에서 나왔다.
09:20 공항가는 지하철표를 샀다.14원
10:15 공항 역에 도착
10:45 출국 수속 종료
13:15 중화인민공화국 출발
~
17:25 대한민국 인천공항 도착
[작성일 2020.2.1 토 밤 10:03]
여행마치고 거의 3개월이 지나서 기나긴 여행기를 마친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또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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