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경기도 고양시 성령대군 묘(2020.7.25 토)

무논골 2020. 7. 27. 18:58

 

화창한 여름 날

아내와 문득 방문하게 된 어느 집안 거실에 있는 액자 

 

 

집안에 가보로 내려오는 문건일 것이다.

 

통정대부에 봉하는 교지이다.

옹정10년이다.

옹정은  중국 청나라의 제 5대 황제인 세종이 사용한 연호로(1723년~1735년)이다.

 

 

 

 

水軍節度使 爲相考事
수군절도사는 일을 상고한다.

 

賑資補用
진휼에 필요한 식량이 부족하여 보태어 쓰고자 

 

次 本營 狀請是在
다음 본영에 올릴 장계에 청함이 이같다.

 

通政帖壹張 價 米貳石 金城地 居
통정첩 1장 값어치는 쌀 2석이니 금성 땅에 사는


朴時憲 處 捧上 出給 爲去乎
박ㅅㅎ 곳에서 (쌀 2석을) 봉상하여 (통정첩을) 내주라 하기에


相考施行向事
상고하여 할 일을 시행한다.

 

相考 서로 비교(比較)하여 고찰(考察)함
賑資 진휼에 필요한 물자.
補用 부족(不足)한 것을 보태어 씀

狀請 예전에, 관찰사나 지방에 나간 벼슬아치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청하는 일을 이르던 말.

是在  ─인. ─임인. ─인 것.

爲去乎 하기에

向事 할 일. 한 일.

捧上 공물(貢物) 등의 진상물(進上物)을 바치는 것. [유사어] 봉납(捧納).
出給 物件을 내어줌

 

 

이 첩을 본 지 보름이 지나서 겨우 해석을 해보았다.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터넷 검색이나 H대 정 선생의 힌트에 힘입어

이쯤에서 해석을 위와 같이 마무리 한다.

 

한문 원뜻과 문법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부분이 있어

인터넷 검색을 하니 <吏>라는 표현이 되면서 뭐라고 뜻을 풀어놨다.

이두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 첩에는 이두식 표현이 들어 있는듯하다.

 

수군절도사 수결에 있는 임자년은

1672,1732,1792,1852년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정 선생이 일러주었다.

 

이렇게 하여 보름 동안의 미로에서 벗어나본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정표가 있어 문득 핸들을 돌려 찾아본

성령대군 묘원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성령대군은 태종의 4자로

양령 효령 충령(세종)의 친동생이다.

 

 

묘역은 평온한듯하다.

저 맨 위 비석이 성령대군 묘이다.

 

 

성령대군의 사당, 대자사

사랑할 자

어버이 큰 사랑이란 뜻인데

14세에 홍역으로 죽어 태종의 슬픔이 담겨있는 이름이다.

 

 

남의 무덤이긴 하지만

그저 한 때 산책하는 기분으로 층계를 오른다.

 

 

핸드폰 사진기를 들이미는 아내 앞에서

동작을 취해본다.

 

 

 

성령대군 묘

 

 

대광보국 숭록대부 성령대군

변한국 소경공 영종정경부사

배 삼한국대부인 창령 성씨 지묘 

 

성령대군이 14세에 홍역으로 요절하였으니

창령 성씨는 무슨 낙으로 사셨을까?

 

왕족,인생

참 무상한거여.

 

조선초에 삼한시대를 소환하여

작록하고 있으니 느낌이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른가 보다.

 

허나 왕손이 되어 높은 작록을 받은 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14세에 조졸하여 후사가 없으니

 

성령의 형인 세종대왕의 3자 안평대군으로 양자 삼아 봉사하게 하였으나

안평대군도 정난에 연루되어 사사되어 그후 겨우겨우 봉사를 받고 있으니......

 

석호와 석양

 

사각형 묘가 특징이다.

고려조 영향이 아직 남은듯한 모습이다.

 

 

문인석

 

성령대군 묘 아래에 왕족의 묘가 새로 조성된듯하다.

 

 

석물이 성령대군 묘 보다 많다.

가덕대부 원천군이라....

 

 

성령대군의 후사가 없어 처음엔 세종의 3자 안평대군이 양자되어 봉사하려하였으나

안평대군도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제6자,원천군이 입계하게 되었다고 비석에 적혀 있다.

 

 

애초 유택은 서울 중랑구 신내동 산136-1번지에 申坐하여 있었는데

서울시 도시계획 확장으로 1991년 이장하였다고 한다.

 

만년 명당은 없나보다.

난 그저 한가롭게 가던 길 멈추었을뿐이다.

 

[작성 2020.8.8 토 오후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