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입암면 왕심마을,
마을 뒤에는 비룡산이 있다.
옛 국도 1호선이 마을 앞으로 지나고 있다.
왕심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메타스퀘어가 멋지다.
옛날 조선시대 역참제도에 의한 왕심원이 있었다는 왕심마을
이곳 왕심마을은 증산도와 관련된 곳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이 증산도 도전에 기록되어 있다.
1 8월 한가위치성을 모신 후에 성도들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정읍에 공사가 있어 가면 장구한 세월이 되겠으니
미리 가서 집 한 채를 사 놓으라.” 하시므로
2 성도 여러 명이 정읍군 입암면 왕심리(旺尋里)에 가서 다섯 칸짜리 주택을 사 놓으니라.
3 태모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원형이정으로 성경신(誠敬信)
석 자를 일심으로 잘 지켜 수행하라. 찾을 때가 있으리라.” 하시고
4 또 말씀하시기를 “수심(修心), 수도(修道)하야 앞세상 종자가 되려거든
충신(忠信)과 진실(眞實)이 제일이라.” 하시니라.
증산도는 아래 내용중에 보천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같은 맥락이다.
증산도가 일어나던 같은 시대에,조선왕조가 흔들리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가던 시대에
동학 운동이 있었으니 그와 관련한 기념비 제막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들은 바가 있었는데
오늘 잠시 발걸음 할 수 있었다.
2020.5.27
기해농민봉기를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사실은 이전에도 해당 기념비석이 있었지만 고속도로 확장공사통에 묻혀버려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사진에 고속도로가 보인다.
‘기해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5년 후인 1899년 5월27일(음력 4월18일) 왕심마을에서 벌왜(伐倭), 벌양(伐洋),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일어난 농민봉기다.
중심인물이 모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동학농민혁명의 구호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라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의 뜻을 모아 봉기하는 거 대단하다.
세월 따라 잊혀지는 거 자연스럽다.
흔적을 지키려는 뜻을 모으는 거도 대단하다.
아래는 모 블러그에서 읽은 위 관련 기사이다.
전문을 전재하는 바 혹시 저작권으로 문제를 제기할 시에는 하시라도 삭제 예정이다.
그러지는 않으리라 본다.
들메지기 2007. 12. 26. 23:18
http://blog.daum.net/emfapwlrl/15177466
입암 왕심이 '영학계'를 기억하는가?
1899년 기해농민봉기 기리는 기념비는 흙과 풀에 덮힌 채 방치되고 있어
이진우 ejw0255@naver.com
▲ 고속도로 옆 풀밭 속에 묻힌 기해농민봉기 기념비가 있는 곳.비룡산과 대흥리, 비룡산과 왕심이,
갑오와 기해 사이에서...
1899년에 일어난 기해농민봉기는 1894년에 실패로 끝난 갑오동학혁명의 후속편이었다.
한시대를 바꾸기 위한 치열한 움직임은 설령 당대에는 실패로 끝난다해도 그 여파는 강력한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 말기에 발생하여 세상을 한번 화들짝 놀라게 하고 한없는 서러움과 피눈물을 대지에 뿌려놓고
통한의 세월 속에 파묻혀버린 저 갑오동학농민혁명 또한 그러했음이다.
우리는 오늘 그들을 기억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그리고 수많은 유명무명의 갑오동학혁명운동가들과 그 후원자들을......
"동학난, 동학당수괴 전봉준과 역적무리", 그 굴레 벗는데 110년이 걸렸다
그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혁명이 불발된 그날로부터 어언 50년이라는 세월이 가도록
이 겨레의 자존을 짓밟고 이 땅을 지배했던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일신을 내던진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활동은 대대로 이어졌고, 광복의 그날이 오던 날 씨알은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참 오래도 불려진 그 이름 동학란, 동학당 수괴 전봉준과 역적의 무리들. 그들의 이름이 떳떳해지기까지는
무려 110여년이 걸렸다. 고려패망이후 개국조선에서 성을 바꾸고 숨어산 왕씨일족들 마냥
동학당 무리들은 일제와 그 추종자들로 인해 오랫동안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혁명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다
잊혀진 이름들, 잊혀진 혁명의 시간, 잊혀진 혁명의 현장들이 제 모습을 떳떳히 드러내기에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민주와 반민주, 독재와 반독재의 투쟁사 속에서 갑오동학혁명은
억업자들에 의해 여전히 불순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갑오동학혁명가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해원의 그날이 도래했고, 구천을 떠돌던 그들의 넋은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혁명의 현장은 그날을 추존하는 수많은 이들의 헌사를 받으며 비로소 명패를 얻었다.
조선조 왕심원이 자리했던 입암 왕심이에서 영학당이 일어났으니...
일명 왕심이가 있다. 조선조에 왕심원이 자리했던 왕심마을은 비룡산 아래에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었다.
때는 1899년이었다. 갑오동학혁명의 재기를 꿈꾸며 일어난 무리들이 있으니 그들을 일러 세상사람들은
영학당이라 했다.
전봉준이 사자후를 토했던 저 유명한 말목장터의 감나무를 부여잡고 울던 이들이 모여 만든
영학계(영학은 예수교를 지칭)가 7개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시도했던 그날의 역사를 우리는
기해농민봉기라 부른다.
영학계가 주도했던 기해 농민봉기를 아는가?
수계장 최익서와 송문여가 이끄는 이들 무리는 비에 젖은 탄약이 되어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이때 이들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인사들 가운데는 동학접주 차치구의 아들인 차경석의 두아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보천교 본부가 자리한 대흥리는 비룡산 아래에 왕심이와 인접해 있는 곳이다.
왕심이와 대흥리 사이에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그리고 왕심이 앞의 호남고속도로 남쪽에는 1번 국도가 교차하는데 그 접선지역 바로 인근에
기해농민봉기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왕심이 앞 호남고속도로와 1번 국도가 교차하는 곳에 기념비가 서있지만...
▲ 절반의 현상, 반은 흙더미에 묻히고 반은 드러나 있구나.
기해농민봉기 100주년 행사로 기획된 이 기념비 설립은 그러나 그 후속이 원활하지 못해 잊혀진
존재인양 여겨져 왔다. 비는 반절이 흙더미에 묻혀 있었고 나머지는 개나리와 풀더미에 묻혀
그 존재마저 희미해져 버렸다.
요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과 그 후속사업에 대한 저울질이 전라북도 전역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고창과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황 아래에서 정읍이 갈길은 멀고도 멀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다.
우리가 터전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을 제대로 보전하는 일은 진인사이고 기념일과 기념사업이 잘되는
것은 대천명에 달려있다. 기해농민봉기 기념지인 왕심이에 세워진 기념비가 바로 서는
그날이 기대된다.
참고 : 정읍시가 제2편 역사 527-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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