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북 정읍 고암서원(2022.5.21 토)

무논골 2022. 5. 22. 15:15

고암서원으로 들어가는 마을 앞에 거목이 있다.

비석은 공로비이다.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다.

 

고암서원은 마을 한가운데 있다.

잠겨 있다.

전화번호 관리자 : 010-5351-0913, 선비문화관: 063-532-5185

 

 

서원 삼문이다.

 

유도문,도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해석해야 자연스러울거같다.

김인환 선생의 글씨이다.

서당 훈장님처럼 너무도 단정한 글씨체이다.

 

 

유도문 옆 안내판이다.

서원터에 있는 묘정비에 대하여 안내하고 있다.

 

강당에서 유도문을 바라본다.

 

 

왼쪽 건물이 강당이고 그 오른쪽 작은 기와 지붕이 묘정비각이다.

 

강당에서 유도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묘정비

 

 

 

 

마모가 심한 비석이다.

여기에 덧지붕을 올려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혹여 나중에라도 참고할까 하여 가깝게 촬영하였지만

도무지 읽어낼 수 없다.

 

 

<출처 미상> 인터넷에서 발견한 고암서원묘정비,  출처를 기록해두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옛 사진,고암서원묘정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이다.

 

정읍 고암서원 묘정비각 전경1986년 이전 촬영된 정읍 고암서원 묘정비각의 모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암서원(考巖書院))]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1호 / 고암서원묘정비 (考巖書院廟庭碑) /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정읍시 상평동 378번지
소 유 자 정읍교육청

관 리 자 정읍교육청

 

위 붉은 색 아래로 인터넷(https://blog.naver.com/il0202/222131842278)에서

발견한 자료를 그대로 옮김

 

 


考巖書院廟庭碑

肅廟己巳。尤菴宋先生自耽羅被拿命。至此縣而受後命。至今五十有餘年。而學士大夫過此地者。莫不齎咨涕洟而不忍去。嗚呼。是孰使之然哉。

 

蓋天生大賢。爲吾道也爲生民也。先生際遇寧陵。身任天下之大義。及夫中道泣弓。事無可爲。則遂乃卷而懷之。猶惓惓不忘於世。以明天理正人心爲己責。閑先聖之道。闢異端之說。實孟朱以後一人。執此義理。雖明知大禍在前而不之顧。以至羣凶交煽。壼極垂傾。而先生首及於禍矣。文谷墓銘。先生絶筆。而其詩曰死有榮時。殆亦先生自道也。先生雖禍於一時。若其天經地義。終是殄滅他不得。反是道者。非邪則逆也。使我東方一域。知君臣父子之倫。免夷狄禽獸之歸者。皆先生賜也。嗚呼盛矣。

 

先生諱時烈字英甫。恩津人。萬曆丁未生。孝宗初服。盡禮聘召。官至左議政致仕。禍作後六年。上大悔悟。壼位重正。於是復先生爵賜祭。又贈諡文正。遺澤所曁。幷設祠以享之。考巖卽其一也。

章甫倡議。將立碑於廟庭。屬縡爲文。略叙其本末志業如此云。

 

고암서원묘정비(考巖書院廟庭碑)

숙종 기사년(숙종 15, 1689년)에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이 제주(濟州)에서 나문(拿問)하라는 명을 받고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이 현(縣)에 도착한 후 명을 받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학사(學士)나 대부(大夫)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아,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저 하늘이 대현(大賢)을 내신 것은 오도(吾道 : 유학을 말함)를 위해서이고 생민(生民)을 위해서이다. 선생께서 효종을 보필할 때 몸소 천하의 대의(大義)를 수립할 것을 자임하셨는데, 중도에 효종이 승하하시어 일을 성사시킬 수가 없었은즉 마침내 계획을 거두어들이고 가슴속에 담아두셨다.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잊지 못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으셨다. 선성(先聖)의 도(道)를 수호하고 이단(異端)의 학설을 물리쳤으니 실로 맹자(孟子)와 주자(朱子) 이후의 한 분이셨다. 이런 의리를 견지하였기에 비록 커다란 화가 목전에 닥친 것을 환히 알면서도 일신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않으셨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번갈아 선동함에 삼공(三公)의 권위가 위태해지더니 선생이 맨 먼저 화를 입게 된 것이다. 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의 호)의 묘지명(墓誌銘)을 짓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은 절필하셨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죽음이 영예로울 때가 있다.’하였으니 자못 선생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비록 한때에 화를 입었지만 천지와 같은 의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말하는 자는 삿된 무리가 아니면 역적(逆賊)이다. 우리나라 동방의 한 강토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알고 오랑캐나 금수로 떨어짐을 면한 것은 모두가 선생 덕분이다. 아, 선생의 덕이 성대하도다.

 

선생의 휘는 시열(時烈)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은진(恩津) 사람이다. 만력(萬曆) 정미년(선조 40, 1607년)에 출생하셨다. 효종이 막 즉위하시어 선생께 예를 다하여 초빙하였으며 관직이 좌의정일 때에 치사(致仕 : 벼슬을 그만둠)하였다.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난 다음 성상(숙종을 가리킴)이 크게 뉘우치고 대위(臺位 : 삼공(三公)의 지위)가 권위가 서고 바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선생의 유택(遺澤)이 함께 미쳐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고암서원이 바로 그 한 가지이다.

장보(章甫)가 발의(發議)하여 묘정(廟廷)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재(縡)에게 비문을 써 주기를 부탁하여 그 본말과 지업(志業)을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사 세자우빈객(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事世子右賓客) 이재(李縡)가 기록하다. 조봉대부(朝奉大夫) 전(前)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쓰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쓰다.

숭정갑신년 후 104년 정묘년(영조 23, 1747년) 2월 일에 세우다

 

 

강당

 

 

고암서원 현판,황욱 근서

 

인터넷 검색 자료 :

황욱  1898∼1992. 서예가.

호는 석전(石田)·남고산인(南固山人)·칠봉거사(七峰居士)·백련산인(白蓮山人).

전라북도 고창 출신.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명정재,임인환 근서

 

 

 

고암서원 중건기,계유년 변시연 근기

 

인터넷 검색자료 :

변시연  한학자, 서예가
출생 1922. 전라남도 장성
사망 2006. 12. 15.
수상 2000년 자랑스런 전남인상 문화공보부 향토문화공로상 전라남도문화상
경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장서가회 부회장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송시열과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배향되어 있다.

 

 

 

고암考巖

 

중건비에 

고정지후考亭之後라고 나와 있다.

 

인터넷 검색자료 : 考亭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살았던 곳의 지명.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서남쪽에 있음. 

이곳에서 주희는 창주정사(滄洲精舍)를 건립하고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들을 고정학파(考亭學派)라 하였음. 주희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

 

 

선현들의 의리를 그대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현들의 의리의 태도를 존경한다.

선현들의 주장이 전수되었을 강당에서 잠시 앉아서 상념에 젖는다.

 

고암서원 복원 사적비

 

 

초성 모천의 고암서원은~~

본원창건 340년 계유 9월

김형관 근찬 김권진(고부향고 전교) 근서 

 

 

지역 유지들 및 각 문중 대표들이 헌성하셨다.

내 고등학교 시절 인사를 드렸던 최현식 선생님도 계신다.

 

 

여러 어른들의 이름이 반가웠다.

 

 

 

 

고암서원 담장 너머로 단군성전이 보인다.

 

* 송시열 관련 유적지 *


대전 남간정사(南澗精舍), 영동 한천정사(寒泉精舍)
榮州 소수서원(紹修書院)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
괴산 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萬東廟)

* 처음 본 글자 *

성뢰(聖賚)
賚 줄 뢰(뇌), 줄 래(내) 위로하다.

 

[작성일  2022.6.5 일요일 21:48]

 

 

<아래는 2023.1.1 일,새해 첫 날 후배가 보내온 자료입니다>

 

고암서원지가 발간되었다.

 

발간사는 이태열 어르신께서 쓰셨다.

내 친구의 부친이시다.정읍향교 전교도 하셨고 선비문화관 관장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