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경기 고양시 행주산성

무논골 2022. 6. 14. 22:45

 

저 멀리 덕양산(해발 124.9m)  위에 행주산성

덕양산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한양 도성의  외外 4산의 하나이다.

 

 

자세히 보면 산봉우리 가운데 쯤에 행주대첩비가 보인다.

행주산성 앞으로는 남북으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방화대교가 지난다.

 

 

행주산성 동쪽과 남쪽은 강으로 둘러쳐있어 평지에 우뚝 솟은 요새일 수 있다.

지금 보이는 물줄기는 행주산성의 동남쪽에서 창릉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곳이다.

한강은 행주산성의 남서쪽을 감싼다.

 

 

방화대교 북단에서 남쪽을 향해 촬영한 모습

저 너머는 김포이다.

 

자전거길 안내지도 

 

 

행주산성 안내도

 

 

권원수공의 상

 

 

밥할머니 이야기

 

 

충장사로 들어가는 길과 홍살문 

서원 등의 홍살문에는 태극 무늬가 있던데

여기는 태극 무늬가 보이지 않는다.무슨 뜻일까?

 

삼도삼문이라는 데 잘 이해를 못하겠다.

 

 

삼도삼문 해설 글 

삼도삼문이 홍살문 밖 길옆에 있는데 여길 설명하는 것은 아닐텐데

해설 글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듯...... 

 

 

충장사 삼문

위에 있는 삼도삼문 해설글이 여기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삼문에 들어서면 충장사가 있다.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 글씨는  낯익다. @@@@@@의 글씨이다.

 

 

 

1979년 10월

임창순 옮기고 김응현 쓰다.

띄어쓰기가 잘 되어 읽기 편하다.

근데 왜 "임창순 옮기고"로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임창순 짓고"가 맞지 않을까?

 

 

 

 

전사청 

 

 

기감천,기씨들의 감천이라는 뜻이다.

행주산성 토성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다.

 

 

행주기씨 유허비

 

 

 

행주산성 토성

 

 

덕양산 정상에서 본 고양시일대 전경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북한산은 한양도성 외사산 중 북쪽에 있는 산이다.

 

 

 

충의정

 

 

덕양산에서 한강 동쪽을 향한 조망

 

 

행주대첩비

 

 

 

 

 

 

 

 

 

 

 

비각 안에 있는 현판 글

원수권공행주대첩비 음기

 

 

公卒旣殯。其宗人之從事於軍者。見余泣且言曰。

公在軍。甞取一卷子若有所箚錄者。曰我死。有壻李議政在。必能誌我墓。以此銘我足矣。

余發其篋。得所謂卷子者。有記其幸州之役。

天朝總督軍門大司馬宋應昌咨奬本國者曰。權某扼守孤危。時抗大敵。板蕩忠臣。中興名將。

繼而兵部尙書石星奏之。則天子嘉之。有勑諭本國者曰。

今觀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其下又記丙申上敎。有云

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

及入對。勞之曰。

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

又曰。

今時事粗安。繄卿之功是賴。殄殲兇賊。奠安國家。予惟望之。

仍賜廐馬云云等語。皆公手迹宛然。

余讀之喟然曰。

多矣哉。此足矣。彬彬乎文哉。又奚以假辭爲也。况公有命。敢不克遵以光大其寵靈乎。

而於碑略之。則又惧史氏之或逸也。

碑成。遂假其背以記。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백사집(白沙集)

공이 작고하여 초빈(初殯)을 마친 다음에 그 종인(宗人)으로 군무(軍務)에 종사했던 사람이 나를 보고 울면서 또 말하기를,
“공이 군중(軍中)에 있을 적에 일찍이 마치 차록(箚錄)한 바가 있는 듯한 한 두루마리를 취하여 말하기를,‘내가 죽거든 내 사위 이 의정(李議政)이 있어 반드시 나의 묘지(墓誌)를 쓸 것이니, 이것으로 나를 명(銘)하면 충분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상자를 열고 이른바 두루마리라는 것을 찾아 내어 보니,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있었다. 

즉 천조(天朝)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대사마(大司馬) 송응창(宋應昌)이 본국(本國)에 자문(咨文)을 올려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권모(權某)는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눌러 지키면서 수시로 대적(大敵)을 막아 내었으니, 어지러운 나라의 충신(忠臣)이요 중흥(中興)의 명장(名將)입니다.”
하였고, 

이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공의 승첩 소식을 천자(天子)께 아뢰었을 적에 천자가 공을 가상히 여겨 본국에 칙유(勅諭)한 데에는 이르기를,
“지금 보니, 전라도(全羅道)에서 참획한 것이 수다하여 해국(該國)의 인민들이 오히려 진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으며, 그 밑에는 또 병신년의 상교(上敎)를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경(卿)은 충성을 다한 노고가 성대히 드러났고 용략(勇略)이 세상에 뛰어나서, 명성이 천하에 드높고 위엄이 적국(敵國)을 습복시켰으니, 원수(元帥)의 직임을 경말고 그 누가 담당하겠는가.”
하였고, 공이 입대(入對)함에 미쳐서는 상이 공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시사(時事)가 조금 편안해진 것은 참으로 경의 공을 힘입은 것이니, 흉적(兇賊)들을 모조리 섬멸하여 국가를 길이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내가 오직 바라는 바이다.”
하고, 인하여 구마(廐馬)를 하사했다는 등의 말들이 있었는데, 모두 공의 수적(手迹)이 완연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훌륭하여라, 이것으로 충분하도다. 문채와 바탕이 갖추어져 찬란한데, 또 어찌 군더더기의 말을 쓸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공의 명령이 있었는데, 감히 그대로 준행해서 임금의 두터운 은총을 빛내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문(碑文)에 이것을 생략해 버리면 사씨(史氏)가 혹 빠뜨릴까 두렵다.”
하고, 

비가 이루어지자 마침내 비의 등쪽에 이 글을 기록하는 바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덕양정과 그 서쪽에서 남북으로 놓인 방화대교

 

 

덕양정

 

 

덕양정에서 바라본 비각 및 행주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