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스크랩] 북창선생 온양정공 휘 렴 유훈비(2018.7.4 수)

무논골 2018. 7. 14. 00:07

업무차 이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잠깐씩 짬을 내어 북창선생 북창선생 묘소를 몇 번이나 찾았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지못하였다.네비게이션이 산길을 정확히 안내하지 못하였고,내 개인적인 탐방에 월급을 축낼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여 긴 시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찾았다.산북초등학교 오른쪽 길을 따라 접어들었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았을터인데

산북초등학교 왼쪽으로 올라 애로 공터에 주차하고 산속에 들어 어렵게 탐색하였다.


내 차를 주차한 곳이다.




구두에 흙이 묻고 양복바지에 날벌레들이 달라붙는 고행길이었다.


이번에도 그만두려하다 멀리 보이는 분묘가 있어 숲길을 헤치고 접근하였다.

어느 순간 그 분묘는 보이지 않고 아래와 같이 북창선생 유훈비를 만날 수 있었다.

내 가남으로는 아까 멀리 보였던 분묘는 총계당(叢桂堂) 할아버지 분묘일 것이다.


북창정렴선생유훈비

이곳 양주 지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가 도락산일거라 생각한다.



북창선생 유훈비

여름 장마철에 풀이 많이 자라 있다.


북창공은 온영정씨가 낳은 큰 역사적 인물로 공은 인품과 학문에 있어서 일문의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셨음은

물론 사상 문학 종교 등 조선조의 지식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셨다.공의 이러한 업적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온양정씨의 고유한 문풍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학자들의 진지한 탐구과제가 되고 있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공의 인품과 학문을 기리고 이후 더욱 공의 유지를 계승 발양시켜 나가기 위해 송의 가르침이 집약된 유훈을 비에 새겨 기념하기로 뜻을 모았다.사정동천 이 곳은 공의 발자취가 서린 곳,공이 선화하신지 오래건만 공이 남기신 가르침은 유훈비와 더불어 영세무궁하리라.


1999년 4월 25일


북창정렴선생 유훈비건립추진위원회 






북창정렴선생 경모문


선생의 성은 정씨 휘는 염 자는 사결 본관은 온양 북창은 아호다.시조는 고려 호부상서 정희공 휘 보천의 7대손인 중시조 고려 감찰어사 휘 응휴의 10대손 조선 우의정 성재공 휘 순붕과 양령대군의 고손녀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연산군 12년(1506) 월 4일에 탄생하여 명종 4년(1549) 7월16일에 서거하니 향년이 44세다.


선생은 배위인 영인 진주 유씨와의 사이에 국창 휘 지복 설학 휘 지임 그리고 1녀(권정기)를 두었다.일가에서는 종형 계향당 휘 초가 선가로 선생과 병칭되었고 일문의 후손에서는 당질 총계당 휘 지승 종손 무송당 휘 회 종증손 예조참판 동명 휘 두경 필선 휘 뇌경 6대손 예조판서 휘 광한 우의정 휘 만석 7대손 이조판서 휘 창순 8대손 이조판서 휘 민시 등 뛰어난 문인 현관 도인들이 배출되었다.


선생은 중종 32년(1537) 사마시에 급제한 후 음율 천문 의약의 조예가 존중되어 조정 천거로 장악원 주부와 관상감 및 혜민서 교수를 역임하다 포천 현감으로 나가 미구에 사임 양주 괴라리에 은거하였다.이렇듯 진사에 그치고 높은 관직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선생 평소의 고아한 성품에 따른 결과다.선생은 성재공의 연행을 수행하면서 심양에서 중국의 도사들을 경탄케 했고 북경에서 외국의 지식인들과 사절들을 만나 학식으로 경복케 하여 당시 천인이라는 칭예가 있었다.



선생은 만권서를 독파한 정박을 겸한 대학자일 뿐 아니라 중국어 유구어를 비롯한 다른 외국어에도 능통하였다.아울러 음율에 통효하고 소술 즉 도교 음악의 대가이기도 했다.선생의 금강산 비로봉 정상에서의 황홀한 소성은 위말 도인 손등의 소술에 비길 만 하다.

선생은 천문 지리 역법 복서 등에도 이해가 깊었고 남긴 시편은 작품마다 진말 시인 도연명의 의취를 승화시킨 수일한 시정이 담겨 있다.선생은 유불선의 요체를 ~동의보감 편찬에


차주환 근찬





遺訓유훈


事父母以孝悌爲本 待妻子以和順爲先

사부모이효제위본 대처자이화순위선


居家以節儉爲要 處世以謙退爲務

거가이절검위요 처세이겸퇴위무


勿做高官爵而居卑 勿托婚於高貴之家

물주고관작이거비 물탁혼어고귀지가


時和則可以祿仕 世乖則退去林野 力耕自給

시화즉가이녹사 세괴즉퇴거임야 역경자급


凡祭祀一依朱文公家禮 參以俗禮 

범제사일의주문공가례 참이속례 


務合人情 子孫中 敢有交結無賴 荒淫無道 敗倫滅德 無所忌憚者 田民全不給 有嫡長子孫者 半減給之

무합인정 자손중 감유교결무뢰 황음무도 패륜멸덕 무소기탄자 전민전불급 유적장자손자 반감급지


嗚呼 聖謨洋洋布在 方策 予言何賴焉

오호 성모양양포재 방책 여언하뢰언


近思錄 小學書 初學之逕蹊而世俗不之看

근사록 소학서 초학지경혜이세속불지간


予言雖老 勿以爲尋常 子孫世世相守 佩服勿失

여언수로 물이위심상 자손세세상수 패복물실



유훈비 뒤로 난 길

이 길을 따라 느린 걸음으로 한 10분 라가면 북창 선생 묘소가 나온다.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 500여미터 가면 총계당叢桂堂 묘소가 나온다고 안내가 되고 있다.아까 숲을 헤매다 멀리 봤던 분묘일 것이다.


며칠전 장마가 있어서인지 계곡물이 풍부하다.


가까운 곳이 북창 선생 묘소


북창 선생 정공 휘 렴지묘

영인 진주 유씨 부좌


묘표墓表



비문은 6세손 예조판서 정광한이 짓고,8세손 이조참판 정민시가 썼다고 어디서 본듯한데 시간이 촉박하여 비문을 자세히 못봤다.

상지삼년기해(정조3년) 1779년 세웠다.


온양정씨 족보에 있는 북창선생 묘표와 유훈

족보에 있는 유훈과 유훈비의 유훈의 글씨 일부 혼착이 있는듯하다.

족보에 있는 유훈 번역도 살짝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다.ㅋㅋ


양주시 향토유적 제 4호 경기도 양주시 산북면 산90


북창 선생 묘 뒤에서 바라본 모습

가까운 숲 왼쪽으로 너머 보이지는 않지만 연인산이 있을테고 오른쪽으로는 도락산일까? 앞에 보이는 먼 산은 수락산일까?


성재 온양 정공 위 순붕지묘

정경부인 완산이씨 부좌


순붕 할아버지는 북창선생의 부친이고

정경부인 완산이씨는 봉양도정 종남의 따님이라고 하는데 양령대군의 후손일 것이다.

봉양도정의 봉양은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봉양리를 뜻하는 것일까?



성재공 묘표



온양정씨 족보에 있는 성재공 묘표



성재공 묘 석물이 일실되어 있다.왜 그럴까?


성재공





단양군수 정공 광훈지묘




?






북창 선생 묘에서 돌아가다 만난 그 개울을 넘었다.


산북초등학교 왼쪽으로 길없는 숲을 헤치고 찾아왔던 것과는 달리

참배후에 돌아가는 길은 또렷했다.


하늘 보이는 방향이 북창 선생 묘소이고

사진 촬영자 서있는 방향이 산북초등학교 오른쪽 길이다.

산북초등학교 오른쪽으로 쭈욱 왔다면 이런 모습을 먼저 만났을 것이다.


조선국 정헌대부 형조판서 온창군 정공 위 백붕 추모비


성재공과 같은 항렬이다.

성재공은 시조할아버지로부터 16세 항렬이고,樂자 항렬은 30세이다.

다같이 13세 袍포할아버지 후손이다. 14세 忠자 항렬에서 갈린다.





조선국 위사공신 해주목사 만죽헌 온양정공 위 현 추모비



산을 벗어나려는 곳에 갑자기 나타난 가옥


불러봤지만 인기척이 없고


저문을 통해 나왔는데 대문에 개들이 사납게 짖는다.


산북초등학교가 숲 속에 살짝 보인다.


[2018.7.13 금 한밤에 글 완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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