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시 56분에 무후사에 도착하였다.
두보초당에서 출발한 셔틀버스가 내려 준 곳은 참 번잡한 주차장이었는데
무후사의 한 단락인 남교공원이었다.
당시에는 동서남북 분간을 못하고 걷다보니 애초 제갈량 유비의 무후사를 간 것이 아니라
유상이라는 사람의 묘를 먼저 가게 되었다.
유상의 묘나 무후사는 다 거기서 거기이지만 경내가 넓어 헛걸음인듯한 느낌도 있었다.
무후사 경내도
황색선 구역이 내가 애초에 오고자 했던 무후사로서 돈을 받는 곳이고
유상의 묘는 무료 개방되는 곳이다.
유상의 묘를 쭈욱 보고 무후사 북문으로 들어와 빠른 걸음으로
남문으로 와서 순방향으로 구경하였다.
일선상에 배치된 것은 아니라서
사실은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약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좀 차분히 동선을 잡을 수 있었을텐데......
남교공원 南郊公园 패방문
저 안에 유상刘湘이란 사람의 묘원이 있다.
민국시기 사천성 주석이며 항전시기 제7전구 사령관을 지낸 사람이다.
2003年12月,原成都市南郊公园合并为武侯祠园林区。
南郊公园原系民国时期四川省主席、抗战时期第七战区司令长官刘湘墓园。
始建于1938年至1942年,400米的中轴线纵贯南北,石牌坊大门、三洞门、四方亭、荐馨堂、墓室等,是西南地区惟一一座北方陵园建筑群。在武侯祠的发展规划中,西区将打造成三国文化的传播体验中心。
1953年经修整辟为公园,依次建有浮雕式石牌坊大门、旌忠门、碑亭、荐馨堂、刘湘墓等建筑。武侯祠东侧的锦里由武侯祠博物馆恢复修建,锦里为清末民初建筑风格的古街。它依托武侯祠,扩展了三国文化的外延,并融入川西民风、民俗,集吃、住、行、游、购、娱于一体,成为成都文化旅游的新亮点。
남교공원 南郊公园 정충문 旌忠門
사방정 四方亭
천형당 薦馨堂
무후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천형당
안에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유상劉湘의 묘
유상의 묘
유상의 묘
1889-1938년
자는 보징甫澄,대읍인大邑人.
국민혁명군 제21군단장
사천성 정부 주석
제7전구사령관
1938년 1월 무한에서 서거
벼를 별로 신경쓰지 않고 관리하는듯한 느낌이다.
홍군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가보다.
유비 묘 혜릉으로 들어가는 길 앞 앞 조벽
사진에서 보이는 조벽 오른쪽으로 유비의 묘인 혜릉으로 이르는 길이다.
살짝 보이는 문을 책란문栅栏门이라 하는듯......
남경의 명 효릉과 비교하면 너무너무 초라한 황제의 능이다.
신도
청나라 때 만들었다.
침전과 묘비석이 같이 보인다.
남에서 북으로 들거가는 형국으로 배치되었다.
아~
황제릉 앞 침전이런가?
천추늠연千秋凜然[lǐn rán]
청나라 광서제 때 쓴 현판에는
영웅의 기상은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더 늠름하다고 적었다.
蜀先主庙
刘禹锡
天地英雄气,千秋尚凛然。
势分三足鼎,业复五铢钱。
得相能开国,生儿不象贤。
凄凉蜀故妓,来舞魏宫前。
한 소열 황제지능
漢 昭烈 皇帝之陵
청나라 건륭제 때 썼다.
혜릉惠陵
봉토 높이 12m
묘 둘레 길이 180m
惠陵은 제갈량전 서쪽에 있다.
시법에 따라 백성을 사랑하고 더불어 좋아하여 "혜惠"라 했으니 묘를 혜릉이라 한다.
감부인과 오부인 두 부인과 합묘이다.
诸葛亮殿西侧是刘备墓,史称“惠陵”。由诸葛亮亲选宝地,葬刘备于此。《三国志·先主传》记载:“八月,葬惠陵”。据《谥法》,“爱民好与,曰‘惠’”,故名刘备墓称“惠陵”。
陵墓中还合葬有刘备的甘、吴二位夫人。刘备墓前有清乾隆年间所立“汉昭烈皇帝之陵”石碑,陵墓建筑 由照壁、栅栏门、神道、寝殿等组成。
陵前有规模较小的神道为清代所建。惠陵与武侯祠主要建筑一样亦为坐北朝南,紧邻在汉昭烈庙与武侯祠西侧。与武侯祠之间有红墙夹道相连。
成都武侯祠的字画、对联甚多,其中的现代书法家沈尹默书写的《隆中对》最引人注目。武侯祠还有岳飞手书的诸葛亮《出师表》刻石(历来对此的真伪存有争议,有一种说法,此前、后两表实际上是明代士人白麟伪托岳飞之名所书)。
유비 혜릉을 견학하는 아이들
유비는 서기 223년에 사천성 봉절현에 있는 백제성에서 죽었다.
이번 여행에서 어떻게든 동선을 이어보려 했는데 가질못하고 귀국하게 된다.
유비의 영구는 성도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한나라 예법에 따라 장사지내게 되었다.혜릉이다.
据《三国志》的记载,刘备于公元223年病故白帝城之后,灵柩运回成都,下葬于此,史称惠陵。而按照汉制,有陵必有庙,所以在同时期,就有了汉昭烈庙诞生。大约在南北朝时期,成都武侯祠与惠陵、汉昭烈庙合并一处。
홍장협도红墙夹道
유비 혜릉을 참배하고 이 붉은 담장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면 제갈량과 유비 사당이 나온다.
사진에서 보이는 오른쪽 담장 너머에 유비 혜릉이 있다.
내 상식으로는 묘廟와 묘墓가 통상 일축선에 조성되는데
여기는 묘廟가 묘墓의 오른쪽에 조성되었고
그나마 묘廟는 신하의 묘가 북쪽,뒷쪽에 조성되어 있어 특이함이 있다.
안내 지도에는 혜릉 북쪽에 공명원孔明苑이 있는데 이정표에도 그렇고......
일부러 찾으려 했건만 현장에서는 별스런 것을 못봤다.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당 정문 祠堂正门
大门内浓荫丛中,矗立着六通石碑,两侧各有一碑廊,其中最大的一通在东侧碑廊内,唐代“蜀汉丞相诸葛武侯祠堂碑”,唐宪宗元和四年(公元809年)立,有很高的文物价值,为国家一级文物,因文章、书法、刻技俱精被称为“三绝碑”。唐朝著名宰相裴度撰碑文,书法家柳公绰(柳公权之兄)书写,名匠鲁建刻字,都出自名家,因此被后世称为三绝碑。 碑文对诸葛亮的一生,作了重点褒评;竭力赞颂诸葛亮的高风亮节,文治武功,并以此激励唐代的执政者。碑文特别褒奖诸葛亮的法治思想,马谡因失街亭被诸葛亮依法处斩,临刑,马谡哭着表示自己死而无怨。李严与廖立,两人都是被诸葛亮削职流放的罪人,但他们也自甘服罪。当他们得知诸葛亮病逝,“闻之痛之,或泣或绝”。这些均属史实,裴度据史褒评,令人信服碑文通篇辞句甚切,文笔酣畅,使人百读不厌。诸葛亮之所以为后人所敬仰,还因为他有着高尚的思想和作风,不利用职权谋私。
사당 정문을 지나면 이문에 이르는 좌우에 비랑이 있는데
나는 유념하여 관람하지 못했다.
이문二門
이문을 지나서 유비묘에 이르는 좌우 행랑에는 촉한 문신과 무신상 각각 14존이 모셔졌다.
동쪽의 문신에는 방통,서쪽의 무장에는 조운이 돋보인다.
각각의 조각상은 실물 크기이고, 그 앞에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으며, 그 간략한 생애가 기록되었는데
저마다 생동감 있어 청대 민간예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으나
점점 건성으로 보았고 사진 하나 남기지 못했다.
左右两廊各有文臣武将十四员,合计共二十八名文武。
东府文官廊以庞统为首,其次为简雍、吕凯、傅肜、费祎、董和、邓芝、陈震、蒋琬、董允、秦宓、杨洪、马良及程畿;
西府武将廊则以赵云为首,依次为孙乾、张翼、马超、王平、姜维、黄忠、廖化、向宠、傅佥、马忠、张嶷、张南及冯习。
유비전刘备殿
단첨갈산식单檐歇山式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单檐은 처마가 하나라는 뜻이고
歇山式은 추녀가 9개라고 하며, 앞뒤로 맞댄 지붕이 있고 옆에서 보면 묏산 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쉽게 말하면 A자 모양이라고 할까?
二门之后是刘备殿,又名昭烈庙。
入武侯祠正门,即可见到气势恢宏的昭烈庙。
昭烈庙为单檐歇山式建筑。
正中有刘备贴金塑像,高3米,仪容丰满庄重,耳大垂肩。左侧陪祀的是他的孙子北地王刘谌像。
刘备像侧原有其子蜀汉后主刘禅像,因刘禅昏庸无能,不能守基业,丧权辱国,宋真宗时被四川地方官撤除,后来就没有再塑。在蜀汉后主刘禅降魏时其子刘谌到刘备墓前哭拜,杀掉家人后自杀身亡。
两侧偏殿,东有关羽父子和周仓塑像,西有张飞祖孙三代塑像,表现了关、张两人的不同外貌和不同性格,又反映了他俩武艺超群、勇猛过人的共同特征。两侧东、西廊房分别塑有蜀汉文臣、武将坐像各十四尊。
东侧文臣廊坊以庞统为首,西侧武将廊房以赵云领衔。
每个塑像如真人大小,像前立有一通小石碑,刊其姓名、生平,便于游人了解。这些塑像,个个气宇轩昂,形神兼备,反映了我国清代民间艺人的高超泥塑技艺。
昭烈庙正殿西壁挂有据说为岳飞所书《出师表》木刻,东壁为现代书法家沈尹默书《隆中对》木刻。
업소고광業绍高光
유비가 촉한을 건국한 것은 서한 고조 유방刘邦과 동한 광무제 유수刘秀가 창시한 기업을 연속적으로 이었다는 뜻이다.
유비의 금상
높이 3m
귀가 크다.
유비 옆에는 원래 유선이 있었는데 송나라 때 그 무능함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할 때 유비의 손자 유건은 유비 묘에 절하고 가족들과 함께 자살하였다.
동벽에 적혀 있는 제갈량 "융중대"
송나라 악비 장군 글씨 출사표
서벽에 목각되어 있었다는데 이걸 말하는지 기억이 없다.
유비 좌우에 각 편실이 있는데
동쪽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 소상,
서쪽에는 장비 3대가 있다.
사진으로 자세히 남기는 못했다.
진나라 진수가 지은 선주전
三国志·蜀书·先主传
陈寿(233年—297年),字承祚。巴西郡安汉县(今四川南充)人。三国时蜀汉及西晋时著名史学家。
先主姓刘,讳备,字玄德,涿郡涿县人,汉景帝子中山靖王胜之后也。胜子贞,元狩六年封涿县陆城亭侯,坐酎金失侯,因家焉。先主祖雄,父弘,世仕州郡。雄举孝廉,官至东郡范令。先主少孤,与母贩履织席为业。舍东南角篱上有桑树生高五丈余,遥望见童童如小车盖,往来者皆怪此树非凡,或谓当出贵人。先主少时,与宗中诸小儿于树下戏,言:“吾必当乘此羽葆盖车。”叔父子敬谓曰:“汝勿妄语,灭吾门也!”年十五,母使行学,与同宗刘德然、辽西公孙瓒俱事故九江太守同郡卢植。德然父元起常资给先主,与德然等。元起妻曰:“各自一家,何能常尔邪!”元起曰:“吾宗中有此儿,非常人也。”而瓒深与先主相友。瓒年长,先主以兄事之。先主不甚乐读书,喜狗马、音乐、美衣服。身长七尺五寸,垂手下膝,顾自见其耳。少语言,善下人,喜怒不形于色。好交结豪侠,年少争附之。中山大商张世平、苏双等赀累千金,贩马周旋于涿郡,见而异之,乃多与之金财。先主是由得用合徒众。
灵帝末,黄巾起,州郡各举义兵,先主率其属从校尉邹靖讨黄巾贼有功,除安喜尉。督邮以公事到县,先主求谒,不通,直入缚督邮,杖二百,解绶系其颈着马柳,弃官亡命。顷之,大将军何进遣都尉毋丘毅诣丹杨募兵,先主与俱行,至下邳遇贼,力战有功,除为下密丞。复去官。后为高唐尉,迁为令。为贼所破,往奔中郎将公孙瓒,瓒表为别部司马,使与青州刺史田楷以拒冀州牧袁绍。数有战功,试守平原令,后领平原相。郡民刘平素轻先主,耻为之下,使客刺之。客不忍刺,语之而去。其得人心如此。袁绍攻公孙瓒,先主与田楷东屯齐。曹公征徐州,徐州牧陶谦遣使告急于田楷,楷与先主俱救之。
时先主自有兵千余人及幽州乌丸杂胡骑,又略得饥民数千人。既到,谦以丹杨兵四千益先主,先主遂去楷归谦。谦表先主为豫州刺史,屯小沛。谦病笃,谓别驾麋竺曰:“非刘备不能安此州也。”谦死,竺率州人迎先主,先主未敢当。下邳陈登谓先主曰:“今汉室陵迟,海内倾履,立功立事,在于今日。(彼)[鄙]州殷富,户口百万,欲屈使君抚临州事。”先主曰:“袁公路近在寿春,此君四世五公,海内所归,君可以州与之。”登曰:“公路骄豪,非治乱之主。今欲为使君合步骑十万,上可以匡主济民,成五霸之业,下可以割地守境,书功于竹帛。若使君不见听许,登亦未敢听使君也。”北海相孔融谓先主曰:“袁公路岂忧国忘家者邪?冢中枯骨,何足介意。今日之事,百姓与能,天与不取,悔不可追。”先主遂领徐州。袁术来攻先主,先主拒之于盱眙、淮阳。曹公表先主为镇东将军,封宜城亭侯,是岁建安元年也。先主与术相持经月,吕布乘虚袭下邳。下邳守将曹豹反,间迎布。布虏先主妻子,先主转军海西。杨奉、韩暹寇徐、扬间,先主邀击,尽斩之。先主求和于吕布,布还其妻子。先主遣关羽守下邳。
先主还小沛,复合兵得万余人。吕布恶之,自出兵攻先主,先主败走归曹公。曹公厚遇之,以为豫州牧。将至沛收散卒,给其军粮,益与兵使东击布。布遣高顺攻之,曹公遣夏侯敦往,不能救,为顺所败,复虏先主妻子送布。曹公自出东征,助先主围布于下邳,生擒布。先主复得妻子,从曹公还许。表先主为左将军,礼之愈重,出则同舆,坐则同席。袁术欲经徐州北就袁绍,曹公遣先主督朱灵、路招要击术。未至,术病死。先主未出时,献帝舅车骑将军董承辞受帝衣带中密诏,当诛曹公。先主未发。是时曹公从容谓先主曰:“今天下英雄,唯使君与操耳。本初之徒,不足数也。”先主方食,失匕箸,遂与承及长水校尉种辑、将军吴子兰、王子服等同谋。会见使,未发。事觉,承皆伏诛。
先主据下邳。灵等还,先主乃杀徐州刺史车胄,留关羽守下邳,而身还小沛。东海昌霸反,郡县多叛曹公为先主,众数万人,遣孙乾与袁绍连和,曹公遣刘岱、王忠击之,不克。五年,曹公东征先主,先主败绩。曹公尽收其众,虏先主妻子,并禽关羽以归。先主走青州。青州刺史袁谭,先主故茂才也,将步骑迎先主。先主随谭到平原,谭驰使白绍。绍遣将道路奉迎,身去邺二百里,与先主相见。驻月余日,所失亡士卒稍稍来集。曹公与袁绍相拒于官渡,汝南黄巾刘辟等叛曹公应绍。绍遣先主将兵与辟等略许下。关羽亡归先主。曹公遣曹仁将兵击先主,先主还绍军,阴欲离绍,乃说绍南连荆州牧刘表。绍遣先主将本兵复至汝南,与贼龚都等合,众数千人。曹公遣蔡阳击之,为先主所杀。
曹公既破绍,自南击先主。先主遣麋竺、孙乾与刘表相闻,表自郊迎,以上宾礼待之,益其兵,使屯新野。荆州豪杰归先主者日益多,表疑其心,阴御之。使拒夏侯敦、于禁等于博望。久之,先主设伏兵,一旦自烧屯伪遁,敦等追之,为伏兵所破。
十二月,曹公北征乌丸,先主说表袭许,表不能用。曹公南征表,会表卒,子琮代立,遣使请降。先主屯樊,不知曹公卒至,至宛乃闻之,遂将其众去。过襄阳,诸葛亮说先主攻琮,荆州可有。先主曰:“吾不忍也。”乃驻马呼琮,琮惧不能起。琮左右及荆州人多归先主,此到当阳,众十余万,辎重数千两,日行十余里,别遣关羽乘船数百艘,使会江陵。或谓先主曰:“宜速行保江陵,今虽拥大众,被甲者少,若曹公兵至,何以拒之?”先主曰:“夫济大事必以人为本,今人归吾,吾何忍弃去!‘
曹公以江陵有军实,恐先主据之,乃释辎重,轻军到襄阳。闻先主已过,曹公将精骑五千急追之,一日一夜行三百余里,及于当阳之长坂。先主弃妻子,与诸葛亮、张飞、赵云等数十骑走,曹公大获其人众辎重。先主斜趋汉津,适与羽船会,得济沔,遇表长子江夏太守琦众万余人,与俱到夏口。先主遣诸葛亮自结于孙权,权遣周瑜、程普等水军数万,与先主并力,与曹公战于赤壁,大破之,焚其舟船。先主与吴军水陆并进,追到南郡,时又疾疫,北军多死,曹公引归。
先主表琦为荆州刺史,又南征四郡,武陵太守金旋、长沙太守韩玄、桂阳太守赵范、零陵太守刘度皆降。庐江雷绪率部曲数万口稽颡。琦病死,群下推先主为荆州牧,治公安。权稍畏之,进妹固好。先主至京见权,绸缪恩纪。权遣使云欲共取蜀,或以为宜报听许,吴终不能越荆有蜀,蜀地可为己有。荆州主簿殷观进曰:“若为吴先驱,进未能克蜀,退为吴所乘,即事去矣。今但可然赞其伐蜀,而自说新据诸郡,未可兴动,吴必不敢越我而独取蜀。如此进退之计,可以收吴、蜀之利。”先主从之,权果辍计。迁观为别驾从事。
十六年,益州牧刘璋遥闻曹公将遣钟繇等向汉中讨张鲁,内怀恐惧。别驾从事蜀郡张松说璋曰:“曹公兵强无敌于天下,若因张鲁之资以取蜀土,谁能御之者乎?”璋曰:“吾固忧之而未有计。”松曰:“刘豫州,使君之宗室而曹公之深仇也,善用兵,若使之讨鲁,鲁必破。鲁破,则益州强,曹公虽来,无能为也。”璋然之,遣法正将四千人迎先主,前后赂遗以巨亿计,正因陈益州可取之策,先主留诸葛亮、关羽等据荆州,将步卒数万人入益州。至涪,璋自出迎,相见甚欢。张松令法正白先主,及谋臣庞统进说,便可于会所袭璋。先主曰:“此大事也,不可仓卒。”璋推先主行大司马,领司隶校尉;先主亦推璋行镇西大将军,领益州牧。璋增先主兵,使击张鲁,又令督白水军。先主并军三万余人,车甲器械资货甚盛。
是岁,璋还成都。先主北到葭萌,未即讨鲁,厚树恩德,以收众心。
明年,曹公征孙权,权呼先主自救。先主遣使告璋,曰:“曹公征吴,吴忧危急。孙氏与孤本为唇齿,又乐进在青泥与关羽相拒,今不往救羽,进必大克,转侵州界,其忧有甚于鲁。鲁自守之贼,不足虑也。”乃从璋求万兵及资(宝)[实],欲以东行。璋但许兵四千,其余皆给半。张松书与先主及法正曰:“今大事垂可立,如何释此去!”
松兄广汉太守肃,惧祸逮己,白璋发其谋。于是璋收斩松,嫌隙始构矣。璋敕关戍诸将文书勿复关通先主。先主大怒,召璋白水军督杨怀,责以无礼,斩之。乃使黄忠、卓膺勒兵向璋。先主径至关中,质诸将并士卒妻子,引兵与忠、膺等进到涪,据其城。璋遣刘璝、冷苞、张任、邓贤等拒先主于涪,皆破败,退保绵竹。璋复遣李严督绵竹诸军,严率众降先主。先主军益强,分遣诸将平下属县。诸葛亮、张飞、赵云等将兵溯流定白帝、江州、江阳,惟关羽留镇荆州。先主进军围雒。时璋子循守城,被攻且一年。
十九年夏,雒城破。进围成都数十日,璋出降。蜀中殷盛丰乐,先主置领酒大飨士卒,取蜀城中金银分赐将士,还其谷帛。先主复领益州牧,诸葛亮为股肱,法正为谋主,关羽、张飞、马超为爪牙,许靖、麋竺、简雍为宾友。及董和、黄权、李严等本璋之所授用也,吴壹、费观等又璋之婚亲也,彭羕又璋之所排摈也,刘巴者宿昔之所忌恨也,皆处之显任,尽其器能。有志之士。无不竞劝。
二十年,孙权以先主已得益州,使使报欲得荆州。先主言,“须得凉州,当以荆州相与。”权忿之,乃遣吕蒙袭夺长沙、零陵、桂阳三郡。先主引兵五万下公安,令关羽入益阳。是岁,曹公定汉中,张鲁遁走巴西。先主闻之,与权连和,分荆州、江夏、长沙、桂阳东属,南郡、零陵、武陵西属,引军还江州。遣黄权将兵迎张鲁,张鲁已降曹公。曹公使夏侯渊、张郃屯汉中,数数犯暴巴界。先主令张飞进兵宕渠,与郃等战于瓦口,破张郃等,收兵还南郑。先主亦还成都。
二十三年,先主率诸将进兵汉中,分遣将军吴兰、雷铜等入成都,皆为曹公军所没。先主次于阳平关,与渊、郃等相拒。
二十四年春,自阳平南渡沔水,缘山稍前,于定军兴势作营。渊将兵来争其地。先主命黄忠乘高鼓噪攻之,大破渊军,斩渊及曹军所署益州刺史赵颙等。曹公自长安举众南征。先主遥策之曰:“曹公虽来,无能为也,我必有汉川矣。”及曹公至,先主敛众拒险,终不交锋,积月不拔,亡者日多。夏,曹公果引军还,先主遂有汉中。遣刘封、孟达、李平等攻申耽于上庸。
秋,群下上先主为汉中王,表于汉帝曰:“平西将军都亭侯臣马超、左将军领长史[领]镇军将军臣许靖、营司马臣庞羲、议曹从事中郎军议中郎将臣射援、军师将军臣诸葛亮、荡寇将军汉寿亭侯臣关羽、征虏将军新亭侯臣张飞、征西将军臣黄忠、镇远将军臣赖恭、扬武将军臣法正、兴业将军臣李严等一百二十人,上言曰:“昔唐尧至圣而四凶在朝,周成仁贤而四国作难,高后称制而诸吕窃命,孝昭幼冲而上官逆谋,皆冯世宠,藉履国权,穷凶极乱,社稷几危。非大舜、周公、朱虚、博陆,则不能流放禽讨,安危定倾。伏惟陛下诞姿圣德,统理万邦,而遭厄运不造之艰。董卓首难,荡覆京畿,曹操阶祸,窃执天衡。皇后太子,鸩杀见害,剥乱天下,残毁民物。久令陛下蒙尘忧厄,幽处虚邑。人神无主,遏绝王命,厌昧皇极,欲盗神器。左将军领司隶校尉豫、荆、益三州牧宜城亭侯备,受朝爵秩,念在输力,以殉国难。睹其机兆,赫然愤发,与车骑将军董承同谋诛操,将安国家,克宁旧都。会承机事不密,令操游魂得遂长恶,残泯海内。臣等每惧王室大有阎乐之祸,小有定安之变,夙夜惴惴,战栗累息。昔在《虞书》,敦序九族,周监二代,封建同姓,《诗》着其义,历载长久。汉兴之初,割裂疆土,尊王子弟,是以卒折诸吕之难,而成太宗之基。臣等以备肺腑枝叶,宗子藩翰,心存国家,念在弭乱。自操破于汉中,海内英雄望风蚁附,而爵号不显,九锡未加,非所以镇卫社稷,光昭万世也。奉辞在外,礼命断绝。昔河西太守梁统等值汉中兴,限于山河,位同权均,不能相率,咸推窦融以为元帅,卒立效绩,摧破隗嚣。今社稷之难,急于陇、蜀,操外吞天子,内残群寮,朝廷有萧墙之危,而御侮未建,可为寒心。臣等辄依旧典,封备汉中王,拜大司马,董齐六军,纠合同盟,扫灭凶逆。以汉中、巴、蜀、广汉、犍为为国,所署置依汉初诸侯王故典。夫权宜之制,苟利社稷,专之可也。然后功成事立,臣等退伏矫罪,虽死无恨。”遂于沔阳设坛场,陈兵列众,群臣陪位,读奏讫,御王冠于先主。
先主上言汉帝,曰:“臣以具臣之才,荷上将之任,董督三军,奉辞于外,不得扫除寇难,靖匡王室,久使陛下圣教陵迟,六合之内,否而未泰,惟忧反侧,疢如疾首。曩者董卓造为乱阶,自是之后,群凶纵横,残剥海内。赖陛下圣德威灵,人神同应,或忠义奋讨,或上天降罚,暴逆并殪,以渐冰消。惟独曹操,久未枭除,侵擅国权,恣心极乱。臣昔与车骑将军董承图谋讨操,机事不密,承见陷害,臣播越失据,忠义不果。遂得使操穷凶极逆,主后戮杀,皇子鸩害。虽纠合同盟,念在奋力,懦弱不武,历年未效。常恐殒没,孤负国恩,寐寤永叹,夕惕若厉。今臣群寮以为在昔《虞书》敦叙九族,庶明励翼,五帝损益,此道不废。周监二代,并建诸姬,实赖晋、郑夹辅之福。高祖龙兴,尊王子弟,大启九国,卒斩诸吕,以安大宗。今操恶直丑正,实繁有徒,包藏祸心,篡盗已显。既宗室微弱,帝族无位,斟酌古式,依假权宜,上臣大司马汉中王。臣伏自三省,受国厚恩,荷任一方,陈力未效,所获已过,不宜复忝高位以重罪谤。群寮见逼,迫臣以义。臣退惟寇贼不枭,国难未已,宗庙倾危,社稷将坠成,成臣忧责碎首之负。若应权通变,以宁靖圣朝,虽赴水火,所不得辞,敢虑常宜,以防后悔。辄顺众议,拜受印玺,以崇国威。仰惟爵号,位高宠厚,俯思报效,忧深责重,惊怖累息,如临于谷。
尽力输诚,奖厉六师,率齐群义,应天顺时,扑讨凶逆,以宁社稷,以报万分。谨拜章因驿上还所假左将军、宜城亭侯印绶。”于是还治成都。拔魏延为都督,镇汉中。时关羽攻曹公将曹仁,禽于禁于樊。俄而孙权袭杀羽,取荆州。
二十五年,魏文帝称尊号,改年曰黄初。或传闻汉帝见害,先主乃发丧制服,追谥曰孝愍皇帝。是后在所并言众瑞,日月相属,故议郎阳泉侯刘豹、青衣侯向举、偏将军张裔、黄权、大司马属殷纯、益州别驾从事赵莋、治中从事杨洪、从事祭酒何宗、议曹从事杜琼、劝学从事张爽、尹默、谯周等上言:“臣闻《河图》、《洛书》,五经谶纬,孔子所甄,验应自远。谨案《洛书甄曜度》曰:‘赤三日德昌,九世会备,合为帝际。’《洛书宝号命》曰;‘天度帝道备称皇,以统握契,百成不败。’《洛书录运期》曰:‘九侯七杰争命民炊骸,道路籍籍履人头,谁使主者玄且来。’《孝经钩命决录》曰:‘帝三建九会备。’臣父群未亡时,言西南数有黄气,直立数丈,见来积年,时时有景云祥风,从璇玑下来应之,此为异瑞。又二十二年中,数有气如旗,从西竟东,中天而行,《图》、《书》曰:‘必有天子出其方’。加是年太白、荧惑、填星常从岁星相追。近汉初兴,五星从岁星谋;岁星主义,汉位在西,义之上方,故汉法常以岁星候人主。当有圣主起于此州,以致中兴。时许帝尚存,故群下不取漏言。顷者荧惑复追岁星,见在胃昴毕;昴毕天纲,《经》曰:‘帝星处之,众邪消亡’。圣讳豫睹,推揆期验,符合数至,若此非一。臣闻圣王先天而天不违,后天而奉天时,故应际而生,与神合契。愿大王应天顺民,速即洪业,以宁海内。”
太傅许靖、安汉将军麋竺、军师将军诸葛亮、太常赖恭、光禄勋(黄权)[黄柱]、少府王谋等上言:“曹丕篡弑,湮灭汉室,窃据神器,劫迫忠良,酷烈无道。人鬼忿毒,咸思刘氏。今上无天子,海内惶惶,靡所式仰。群下前后上书者八百余人,咸称述符瑞,图、谶明征。间黄龙见武阳赤水,九日乃去。《孝经援神契》曰:‘德至渊泉则黄龙见’,龙者,君之象也。《易》乾九五‘飞龙在天’,大王当龙升,登帝位也。又前关羽围樊、襄阳,襄阳男子张嘉、王休献玉玺,玺潜汉水,伏于渊泉,晖景烛耀,灵光彻天。夫汉者,高祖本所起定天下之国号也,大王袭先帝轨迹,亦兴于汉中。今天子玉玺神光先见,玺出襄阳,汉水之末,明大王承其下流,授与大王以天子之位,瑞命符应,非人力所致。昔周有乌鱼之瑞,咸曰休哉。二祖受命,《图》、《书》先着,以为征验。今上天吉祥,群儒英俊,并起《河》、《洛》、孔子谶、记咸悉具至。伏惟大王出自孝景皇帝中山靖王之胄,本支百世,乾祗降祚,圣姿硕茂,神武在躬,仁覆积德,爱人好士,是以四方归心焉。考省《灵图》,启发谶、纬,神明之表,名讳昭著。宜即帝位,以篡二祖,绍嗣昭穆,天下幸甚。臣等谨与博士许慈、议郎孟光,建立礼仪,择令辰,上尊号。”即皇帝位于成都武担之南。为文曰:“惟建安二十六年四月丙午,皇帝备敢用玄牡,昭告皇天上帝后土神祇:汉有天下,历数无疆。曩者王莽篡盗,光武皇帝震怒致诛,社稷复存。今曹操阻兵安忍,戮杀主后,滔天泯夏,罔顾天显。操子丕,载其凶逆,窃居神器。群臣将士以为社稷堕废,备宜修之,嗣武二祖,龚行天罚。备惟否德,惧忝帝位。询于庶民,外及蛮夷君长,佥曰‘天命不可以不答,祖业不可以久替,四海不可以无主’。率土式望,在备一人。备畏天明命,又惧汉阼将湮于地,谨择元日,与百寮登坛,受皇帝玺绶。修燔瘗,告类于天神,惟神飨祚于汉家,永绥四海!”
章武元年夏四月,大赦,改年。以诸葛亮为丞相,许靖为司徒。置百官,立宗庙,袷祭高皇帝以下。
五月,立皇后吴氏,子禅为皇太子。六月,以子永为鲁王,理为梁王。车骑将军张飞为其左右所害。初,先主忿孙权之袭关羽,将东征,秋七月,遂帅诸军伐吴。孙权遣书请和,先主盛怒不许,吴将陆议、李异、刘阿等屯巫、秭归;将军吴班、冯习自巫攻破异等,军次秭归,武陵五溪蛮夷遣使请兵。
二年春正月,先主军还秭归,将军吴班、陈式水军屯夷陵,夹江东西岸。二月,先主自秭归率诸将进军,缘山截岭,于夷道猇亭驻营,自佷山通武陵,遣侍中马良安慰五溪蛮夷,咸相率响应。镇北将军黄权督江北诸军,与吴军相拒于夷陵道。夏六月,黄气见自秭归十余里中,广数十丈。后十余日,陆议大破先主军于猇亭,将军冯习、张南等皆没。先主自猇亭还秭归,收合离散兵,遂弃船舫,由步道还鱼复,改鱼复县曰永安。吴遣将军李异、刘阿等踵蹑先主军,屯驻南山。秋八月,收兵还巫。司徒许靖卒。冬十月,诏丞相亮营南北郊于成都。孙权闻先主住白帝,甚惧,遣使请和。先主许之,遣太中大夫宗玮报命。冬十二月,汉嘉太守黄元闻先主疾不豫,举兵拒守。
三年春二月,丞相亮自成都到永安。三月,黄元进兵攻临邛县。遣将军陈笏讨元,元军败,顺流下江,为其亲兵所缚,生致成都,斩之。先主病笃,托孤于诸葛亮,尚书令李严为副。夏四月癸已,先主殂于永安宫,时年六十三。亮上言于后主曰:“伏惟大行皇帝迈仁树德,覆焘无疆,昊天不吊,寝疾弥留,今月二十四日奄忽升遐,臣妾号啕,若丧考妣。乃顾遗诏,事惟大宗,动容损益。百寮发哀,满三日除服,到葬期复如礼;其郡国太守、相、都尉、县令长,三日便除服。臣亮亲受敕戒,震畏神灵,不敢有违。臣请宣下奉行。”五月,梓宫自永安还成都,谥曰昭烈皇帝。秋,八月,葬惠陵。
评曰:先主之弘毅宽厚,知人待士,盖有高祖之风,英雄之器焉。及其举国托孤于诸葛亮,而心神无贰,诚君臣之至公,古今之盛轨也。机权干略,不逮魏武,是以基宇亦狭。然折而不挠,终不为下者,抑揆彼之量必不容己,非唯竞利,且以避害云尔。
유비전에서 제갈량 무후사로 이어지는 과청
유비전 뒤로 몇 계단 아래로 무후사라고 쓴 편액이 있는 과청을 지나 무후사가 있다.
무후사는 삼국시기 촉한 승상 제갈량을 기념하는 곳인데
제갈량은 생전에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지고 사후에 시호는 충무忠武인며 그래서 제갈량 사당을 무후사라 했다.
무향武鄕은 섬서성陕西省 汉中市 汉台区 武乡镇이다.
이번 여행에서 다녀온 측천무후의 고향 사천성 광원에서 서북쪽으로 130km 떨어진 곳에 한중이라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가 있고 그 도시 북쪽 15km에 있다.
刘备殿后,下数节台阶(武侯祠低于汉昭烈庙,象征古代君臣关系),是一座 过厅,挂有“武侯祠”匾额。武侯祠是纪念三国时蜀汉丞相武乡侯诸葛亮的祠堂,诸葛亮生前封“武乡侯”,死后谥号“忠武”,故纪念他的祠堂称作“武侯祠”。
诸葛亮殿悬“名垂宇宙”匾额,两侧为清人赵藩撰书“攻心”联:
“能攻心则反侧自消,自古知兵非好战;
不审势即宽严皆误,后来治蜀要深思。”的联文,是颇负盛名的一副对联,借对诸葛亮、蜀汉政权及刘璋政权的成败得失的分析总结,提醒后人在治蜀、治国时借鉴前人的经验教训,要特别注意“攻心”和“审势”。
正殿中供奉着诸葛亮祖孙三代的塑像。
殿内正中有诸葛亮头戴纶巾、手执羽扇的贴金塑像,像前的三面铜鼓相传是诸葛亮带兵南征时制作,人称“诸葛鼓”。鼓上有精致的图案花纹,为珍贵的历史文物。大殿顶梁由乌木制成,上书诸葛亮写给儿子诸葛瞻《诫子书》中“非澹泊无以明志,非宁静无以致远”(不看轻世俗的名利就不能明确自己的志向,不是身心宁静就不能实现远大的理想)。诸葛瞻及其子尚在绵竹抗击魏将邓艾的战斗中不幸身亡。
汉中崔永德提起咱家「武鄕」这个小地方,在汉中城北约十五公里,站在商业文化立场来看,是个穷鄕小地方;但是讲起它的歷史,却是赫赫有名;按史书记载:武鄕、候国、蜀汉封诸葛亮为武鄕侯,地在今陕南褒城东、汉中北。经各方查证,確为咱家武鄕小鎭是也。秦末楚汉相爭,重要的主角是项羽,为了安抚各位群雄,佔地封王,一共封了十八个王,刘邦被封为汉中王。三国中的刘备驻汉中很久,为奬励诸葛亮功勋,依其...
제갈량전 诸葛亮殿
名垂宇宙 이름이 우주에 드리워져 있다.
제갈량 조손 3대가 모셔있다.
제갈량전 뒷 처마와 기둥
단청하지 않았다.
산동성 맹자를 모신 맹부 마냥
이곳 제갈량전의 분위기도 소박고졸하다.
거의 4시가 다 된 시간이다.
삼의묘
무후사 제갈량전 뒤에 있는 삼의묘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 문이 잠겨 있었던듯하다.
도원중의
三义庙现,初名三义祠,清康熙初年由四川提督郑蛟麟始建。
乾隆四十九年(1784)因焚香引起大火被毁,乾隆四十九年(1787)重建,道光二十二年(1842)又曾全面修葺。
现在所见建筑和匾联主要是道光年间的遗存。其建筑为混合结构,面积569㎡,四造五殿,规模宏大。
后渐坍圮,仅存少量建筑尚完好,1981年被公布为成都市市级文物保护单位。
1998年,因城建需要三义庙由提督街迁建到武侯祠内。
삼국진열실
혜릉과 조벽을 사이에 두고 삼국진열실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서둘러 봤지만 제법 자료가 풍부하다.
临江仙·滚滚长江东逝水
杨慎(明) 《廿一史弹词》第三段说秦汉开场词
滚滚长江东逝水,浪花淘尽英雄。
是非成败转头空。
青山依旧在,几度夕阳红。
白发渔樵江渚上,惯看秋月春风。
一壶浊酒喜相逢。
古今多少事,都付笑谈中。
돌에 생명이 있어 태어난다.
한쪽에 쉬면서 배낭에 있던 땅콩 부스러기에 힘을 얻어 다시 걷는다.
무후사 북쪽 금리 거리에 나왔다.
무후사와 금리 거리는 그냥 붙어 있다고 보면 된다.
금리 거리는 매우 번화하다.
돈쓰면서 쇼핑도 하고 먹는 거 즐기면 좋았겠지만......
닭날개 15원
순두부 같은 거 豆花 10원
물 2원
금리 거리에서 무후사 서쪽 담장을 따라 어느새 남교공원 패방까지 왔다.
설도 망강루 공원까지는 대중교통이 연결되기는 하지만
택시를 탔다.15시 51분
택시는 간선도로를 힘차게 달려
16시 10분 망강루공원에 도착한다.
택시비 22원
<작성 2019.7.20 토 저녁 태풍 다나스가 소멸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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