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 이야기

전북 완주 진안 임진년 웅치전적비(2015-07-25 토)

무논골 2015. 7. 27. 22:51

2년간 전주에서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정읍 고향집에 들러 서울로 가야하는 상황에서

완주와 진안의 경계에 있는

곰티재를 방문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 중에서 전라도 전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곰티 웅치싸움.

전주에는 전주 이씨 말고도 전의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전의 이씨 중에서 당시 관직에서는 물러나 있던 의병장 이정란 공이 유명하다.

그래서 전주시에는 그의 호를 따서 충경로라는 길이름도 있고,

이 지역 방어 임무를 가지고 있는 육군 3*사단을 충*,*경부대라고 부른다.


[2019.1.20 일, 위 글에서 부대이름을 검색되지 않게 수정하였다.블러그 유입 단어를 보니 자꾸 그 부대명이 나온다.

그 부대 이름으로 검색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정보가 없기 때문에 부대이름을 살짝 수정하였다.] 

아는 이는 자부심있게 이야기 하지만

모르는 이는 전혀 모르고 있다. 

 

멀리 가장 낮은 산마루에 주목하면 흰색 인공조형물이 보인다.

진안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흰색 조형물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웅치전적비이다.

전적비는 완주 쪽에 서 있고 싸움은 저 너머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진안에서 완주로 넘어오는 골짜기를 방어하는 전투가 웅치전투이다.

 

 

완주에서 전적비 있는 고스로 가는 길...

무더의를 피해 길가 곳곳에 차를 대고 있다.

 

 

드디어 진안군 부귀면과 경계에 이른다.

사실 나는 네비게이션을 따라 저 너머 부귀면 쪽에서 올아왔다.

 

웅치전적비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안내문을 보며 왼쪽 시멘트포자길을 100m 오르면 다다른다.

 

한문으로 웅치전적비라고 써있다.

웅치는 이곳 사람들이 일상 말하는 곰티재를 말하는 것이다.

 

 

1979년 12월에 건립한 걸로 되어 있다.

당시 국부가 죽어도 일은 진행되는 것인가 보다.

그래야 당연한 세상 이치이겠지.

 

이해하기 힘든 부조물

 

부조가 뭔가를 설명하고 있겠지만 쉽게 이해는 안간다.

 

 

**백과사전에서 웅치전투에 대하여 검색한 내용이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웅치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2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장소 전라도 웅치
결과 일본의 승리
교전국
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조선 왕국
Toyotomi mon.png
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권율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이봉
강운
박형길
이광
이정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안코쿠지 에케이
병력
총병력 7000명 1만 명
피해 규모
정담, 강운, 박형길 장군 등 군사 수백 전사 모름

웅치 전투(熊峙戰鬪)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1592년(선조 25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전라도 웅치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로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휘하 방정영박석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장 황박, 이광 등의 의병이 합류하였고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군가 변응정(邊應井) 등이 나섰으나 4명의 장군들과 군사 3000명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당시 왜군 6부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은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충청도 금산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하려 하였고 이에 전라도의 모든 관군과 의병 1000명이 모여 웅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7월 초순에 들어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할 준비를 서둘렀다.[1] 일본군은 별군(別軍)을 편성해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瑗)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 사람은 안국사를 창건한 승려인데 절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전라감사라 하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뿌려댔다.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왔다.[1]

일본군의 웅치 진입과 조선군의 배치

안코쿠지의 상사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한성에 있다가 안코쿠지의 진로에 차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1] 지례, 무주를 경유해 금산을 거쳐서 안코쿠지와 합류했다.[2]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안에서 전주 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곰티재)를 넘어야 한다. 또 다른 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산의 이치(배재)를 넘어야 한다.[2] 이때 광주목사 권율광주 지방에서 모집한 군사 1,500여 명을 직접 이끌고 이치를 지켰다. 이 부대에는 일본에 가서 기개를 떨친 동복현감 황진도 가담하고 있었다. 김제군수 정담(鄭湛)이 웅치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며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군이 선발대에 배치되었다. 황박(黃璞) 등 의병도 다수 가담했다.[2]

웅치 방어선에는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등이 모였는데 3개로 방어선을 나누어 구축했다. 제1방어선은 산 아래 의병장 황박이, 제2방어선은 산 중턱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3방어선 산 정상에는 김제 군수 정담이 배치되었다. 음력 7월 7일 안코쿠지 에케이는 군대를 이끌고 총공격하여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정담이 지키는 제3방어선이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희생도 커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전투 경과

7월 7일 일본군 선봉대가 조총을 쏘아대며 웅치로 올라왔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일본군은 병력을 총동원해 진격했다. 1선을 맡은 황박군이 저지하다가 밀려나자 2선을 맡은 이복남군이 나섰다. 적은 2선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2] 정상에는 정담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붙여도 후퇴하지 않고 선두에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날이 저물고 화살이 떨어져 군사가 흩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끝까지 백병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2]

그러나 조선군이 화살이 떨어지자 왜군은 철수를 취소하고 다시 재공격하여 이 과정에서 조선군이 밀리게 되었다. 이복남이 이끄는 나주관군은 안덕원까지 퇴각했고, 피하지 못한 정담강운, 박형길 등이 전사했다.

결과 및 영향

전투 후에 웅치의 긴 고갯길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2]

웅치에서 관군과 의병이 패하자 전 성균관 정6품을 지냈던 이정란(李廷鸞)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하고 전라감사 이광도 성을 굳게 지켰다. 결국 안코쿠지 에케이금산으로 후퇴하고 안코쿠지는 후퇴 도중 웅치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