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5일 월요일
무한역에서 오후 6시 25분에 출발한 기차는 서쪽으로 달려서
한구 한천 천문남을 거쳐
형주역에 도착하였다.
형주역에 도착하니 밤이다.
이 도시에서 오늘 밤 내가 할일은 잠자는 것이다.
어느 아주머니가 다가와 호객을 한다.
기다렸다는듯이 나는 몇 마디 흥정을 하는 중에
이 아주머니를 따라 가리라 생각을 이미 정하였다.
호객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일이십원 깍아야 하는 대학생 여행자들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으나
나에게는 여관비 깍는 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
원채 가격이 저렴하고......80원
깍아봤자 몇 원이나 깍겠는가!
형주역에서 호객해주신 아주머니와 뒷 자리 내 아내(2017.5.15 월요일 밤)
나는 이들이 달리는 동안 좀 큰 걸음으로 걸었다.
땀이 난다.어서 쉬고 싶다.
아주머니가 안내한 곳은 일반 아파트 가정집이다.
본인은 2층에서 살림하고 우리는 4층에 안내해준다.
4층에 있는 한 가구를 여관 각 객실로 여러개를 만들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창문 너머 밤 늦도록 보름달이 비추었다.
괜찮은 집이다.
<인터넷 검색한 형주>
징저우(형주, 중국어 간체: 荊州, 병음: Jīngzhōu)는 형주시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 성 남부에 위치하는 지급시이다.
장강의 중류에 위치하는 항만 도시로, 일찍이 ‘형주’로 불린 지방의 일부였으며, 당시의 중심 도시인 江陵(지앙링)은 현재 형주 시내에
《형주 고성》으로 남아 있다.
형주에는 초나라 이래 400년 이상 수도였기 때문에 초나라 도시 유적이 5개소, 유물이 발굴된 장소가 73개소, 그 외 분묘는 800개소 이상(집왕묘가 18개소)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시인, 굴원의 땅이기도 하다.
또한 삼국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장강 연안의 오림(烏林,함녕시의 대안)은 적벽대전의 옛 전장이었으며,
형주의 수비를 맡아 결국 목숨을 잃은 촉한의 관우가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강릉은 삼국 쟁탈의 성이며, 오나라의 손권에게 강릉 공략을 명령받은 주유가 위나라의 조인, 서광을 물리치고 공략했지만,
주유는 이 때 치명상을 입었다.
장강 연안의 항만 도시인 사스 구와 성곽도시의 《형주 고성》이 있는 징저우 구는 인접하고 있다.
형주 고성은 일찍이《강릉성》으로 불리었고, 최근까지 구 강릉현의 중심이었다. 관우가 최초로 건설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많은 전투로 쟁탈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현재 남은 성곽 도시는 1646년에 재건된 것이다. 성벽의 높이 9m, 두께는 10m로,
둘레는 9.3 km에 이른다. 성벽, 성문 등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형주 고성 내부에는 형주 박물관이 있어, 형주 주변에서 출토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2000년 전 남자의 미라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게 발굴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견직물이나 칠기의 출토품 등도 전시되고 있다.
그 밖에도 원대에 건립된 장화사(章華寺), 명대에 장강 가에 지어진 만수보탑(萬壽寶塔) 등이 시의 명소이다.
현재의 징저우 시 주변은 장강 문명이 번창한 곳이었으며, 6,000년 전의 다시 문화의 유적도 출토되고 있다.
또 춘추시대, 전국시대의 초나라의 수도 영(郢)은 이 주변에 위치한 곳이었다.
고대의 지역명인 형주(荊州)는 한 때의 구주(九州)의 하나였고, 전한 초기의 13주의 하나이기도 하였으며,
현재의 후베이 성과 후난 성 징난(荊南)에 걸쳐 위치한 곳이었다.
형주는 장강 중류의 수운에 의한 교통과 물류의 거점으로 전략상의 요지이기도 하여,
병가에서는 반드시 확보하여야 하는 땅으로 여겨졌다. 형주 시역의 동쪽 《오림》(烏林)은 후한 말의 적벽대전이 치러진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위촉오 삼국의 경계의 땅이었다. 육조 시대, 전진의 남하에 의해 양양(襄陽)에서 쟝링(형주 고성)으로 형주의 중심이
옮겨져 이후 청나라 대까지 형주부의 중심은 쟝링에 있었다.
청일 전쟁 패전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사스는 개항지가 되었다.
중일 전쟁에서는 1940년 6월에 사스는 일본군에 점령되어 종전까지 점령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형주 주변은 몇 번이나 행정구분의 변경이 있었고, 1994년에는 사스 시, 장링 현, 징저우 지구가 합병해,
징사 시(荊沙市)가 발족되었다. 1996년에 《징저우 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의 동쪽은 우한 시(武漢市)에, 남동은 셴닝 시(咸寧市)에, 북쪽은 징먼 시(荊門市), 셴타오 시(仙桃市) 및 첸장 시(潜江市)에, 서쪽은 장강의 계곡, 삼협이 있는 이창 시(宜昌市)에, 남쪽은 후난 성 웨양 시(岳陽市)에 각각 접하고 있다.
2017년 5월 16일 화요일 아침 형주성 앞에서 촬영한 굴원의 상
위 인터넷 검색에도 형주는 초나라의 귀족 굴원의 땅이라고 했는데....
屈原曰 吾聞之하니 新沐者는 必彈冠하고
(굴원이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新浴者는 必振衣라.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로 受物之汶汶者乎아. (어떻게 자신의 깨끗함으로 상대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하여 葬於江魚之腹中이언정 (차라리 상수(湘水)의 물결에 뛰어들어 강의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질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으로 而蒙世俗之塵埃乎아.
(어떻게 희고 흰 결백함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漁父莞爾)而笑하고 鼓枻而去하여 乃歌曰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저어 떠나면서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어든 可以濯吾纓이요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빨 수 있고)
滄浪之水濁兮어든 可以濯吾足이라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을 수 있다네.”라고 하고는)
遂去不復與言하더라.(마침내 떠나서 더 이상 함께 말하지 않았다.)
형주성 동문밖 해자 모습
형주역 근처 여관에서 일어나 곧바로 택시를 탔다.택시비는 10원
택시가 내려준 곳이 이 사진에 나오는 해자의 바로 오른쪽 공원 큰길이었다.
택시 기사는 내가 왜 형주고성을 가야하는지 이해를 못하는듯...매표소에 가까운 곳에 내려줘야하는데
한참을 걸어서 저기 해자가 소실되는 곳 근처에 있는 매표소로 걸어갔다.
굴원의 상도 그 근처에 있다.
형주역에서 약 10km 거리에 있는 형주고성까지 버스도 있지만 시간 절약하려고 택시를 탔는데
한참을 걸어야 했다.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느긋하게 공원을 산책하면서 매표소로 다가갔다.
매표소 아가씨가 참 친절하게도 내 시간 여건을 안배하여 여행 여정에 대하여 설명도 해주고 지도도 공짜로 집어준다.
여행하다보면 이런 작은 친절에도 피곤을 녹이곤 한다.
형주고성 안내지도.
위 사진 기준으로 오른쪽 부분을 서둘러 구경하고 다음 여행지인 양양으로 가기 위해 사스沙市터미널로 갔다.
굴원의 상,빈양루,동문,장거정 옛집을 구경했고...
괴물같이 거대한 관우상은 멀리서 봤고
성내 관제묘와 관우사,형주박물관은 가보지 못했다.
굴원상에서 빈양루까지는 성내 전용차로 이동하였다.
빈양루와 장거정 고가 구경하는데 1인당 55원이다.
빈양루 성벽
빈양루
인터넷 검색
宾阳楼原名“寅宾楼”, 俗称东门楼,始建于明代,清咸丰十一年(公元1861年)重建。1987年8月,由国家文物保护科研所设计修复完善,1987年正式向中外游客开放。整个楼台高9.5米,东西宽12.65米,南北长34米,采用大木框架结构,气势宏伟,造型别致,保持了明代建筑的风格,“宾阳楼”三个金色的大字由赵朴初(1907—2000,1907年11月5日生于安庆,中国民主促进会创始人之一,卓越的佛教领袖、杰出的书法家、著名的社会活动家与伟大的爱国主义者)题。
宾阳楼的马道旁专门用木版搭成上城的阶梯,拾级而上,宾阳楼里的三国著名人物立即跳入眼帘。刘备、张飞、关羽、诸葛亮、赵子龙的仿铜巨塑或座或立,栩栩如生。宾阳楼外环绕而立的也是马童周仓等三国武士的仿真彩塑。《三国演义》120回,就有72回与荆州有关,荆州的每一寸土地似乎都散发着三国风云人物的气息。
빈양루 옹성
빈양루에서 바라본 옹성과 해자
빈양루
빈양루 성벽
빈양루 바깥 성벽
빈양루에서 멀리 관우상을 바라봤다.
장거정 고택에서 바라본 빈양루
장거정 상을 뒤로하고 서있는 중국 아저씨.
혼자 여행왔다.
내 아내랑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참 신기하다.
아내는 한국말로 하고
저 노인은 중국말로 하고 있는데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통하는듯한 모습이다.
참 신기하다.
문성전,공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장거정찬
아래는 다음포탈에서 검색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후베이성 장링 현 출신으로, 잘 생기고 수려한 외모를 타고났다. 1547년 가정 24년 진사로 합격했다. 처음에는 한림원 서길사가 되어, 세계에 그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이 된다. 서계가 재상이 되면서 그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예부우시랑, 이부좌시랑, 예부 서경 등을 역임하였고, 융경 원년(1567년)에 입각하여, 서계가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가정제가 중용한 도사를 배제할 때 그 한쪽 역할을 맡았다.
이 때 서계의 정적이었던 고공은 이 모의로부터 배척당한 것으로 서계를 앙심을 품게 되며, 서계의 아들의 죄를 들어 서계를 탄핵하지만, 반격을 당해 파면되었다. 하야를 한 고공은 태감 이방 등과 연결해 서계의 실각을 노리게 된다. 그 후 서계는 1568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서 예부서경 조정길이 선택되었다. 고공은 복권을 위해 이방을 통해 장거정에게 협력하게 하고 고공은 복권하여 조정길을 대신해 재상이 되었다.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해 권력을 기반을 다지고, 더욱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고공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내시 풍보와 연합해,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 융경제가 1572년 사망하고, 장거정이 지지하던 만력제가 즉위 한다. 이 때에 융경제의 유언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수보의 지위에 올랐다.
만력제를 등에 업은 장거정은 독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차례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관리의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 등의 입을 봉해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의 철폐, 강기숙정(綱紀肅正)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한다.
당시 지방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것을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되고 있던 은으로 납세를 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 탄압, 기득권의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1577년 만력 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휴직 중에 탄핵 되는 것을 무서워해 복상을 하지 않았다. 1581년 만력 9년에 병으로 쓰러져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상주국(上柱國)의 봉호와 문충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후 부모의 복상을 빠뜨린 것 등을 이유로 탄핵이 잇따라, 만력 11년 1583년에는 봉호와 시호가 박탈되고 사후 사형을 받아 가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장남 경수는 자살하고 가족은 변경으로 보내졌다. 장거정 사망 58년 후에 그의 후손과 일가족들은 조정에 의해 복권 하였다.
순충당(純忠堂),순수한 충성
元辅良臣와 문련 爾唯鹽梅;汝作舟楫은 모두 만력황제가 써서 장거정에게 준 글씨이다.
그의 정원인 낙지원 현판과 좌우 그의 싯귀.
고문진보를 보면 한나라 때 仲長統이란 사람이 지은 낙지론이라는 글이 있다.전원에서 살겠다는 글이다.
결혼할 때 주례선생님께서 서예작품으로 그 대작을 주셨는데....
거기서 이름얻은 것인가?
장거정 글 与楚中抚佐台辞建第助工
장거정 침실
장거정 고택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사시(沙市)터미널로 갔다.12원
사시를 출발한 버스는 시 북쪽에 있는 형주종합터미널을 경우하여 쭈욱 북으로 올라 양양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형주종합터미널로 가면 더 가까웠을텐데...
핸드폰 인터넷 검색이 안되어 눈뜬 장님처럼 여행을 하고 있다.
양양까지 버스비는 1인당 85원이고 보험료 3원은 별도이다.
사시터미널 앞에서 중국식라면 두 그릇을 먹었다.
혹시 맛없을까봐 한 접시만 먼저 시켰는데 입맛이 맞아서 서둘러 한 그릇 더 달라고 하였다.
한접시에 4원
달걀과 물 5원
포도는 1근에 30원인데...얼렁뚱땅 좀 더 담고는 35원에 달라는 것이다.
한국 아주머니는 30원을 주겠다고 하고
중국 아주머니를 35원을 달라고 하고... 한국 아주머니가 勝...기세로.
형주를 출발한 버스는 북으로 북으로 달린다.양양까지는 거의 다섯 시간 달린듯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떨어져 앉기로 했다.
버스는 거의 빈차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맨 뒷자리로 갔다.젊은 남녀가 서로 심하게 비벼댄다.
안방 차지한것처럼 널부러져있다.
차창 풍경은 참 평화롭다.
높지 않은 언덕과 논과 밭,마을이 끝없이 이어진다.
깊지 않은 숲이 아주 넓게 바다를 이룬다.
형문(荊門)에 12시 52분
산무진(山武鎭)에 14시 22분
양양버스터미널이 여럿 있는데
첫번째 터미널에서 내렸다.
변소가 가관이었다.
제갈공명의 고융중古隆中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다. 25원
가는 동안에 보게되는 단계(檀溪)라는 지명이 왠지 기분이 좋다.
단군왕검과 관련이 있을까?
귀산능원歸山陵園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무엇일까?
의아해했었다.중국 역대 수도와 먼 이곳에 능이 있지?
귀국하여 인터넷 검색했더니 몇 년 전 허가받은 공동묘지였다.
호북문화학원이라는 학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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